지옥 문 앞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은 이런 모습일까.
목적은 다르지만 품고 있는 욕망은 같은 남자들이 한 데 엉켜 지옥으로 치닫는다. 폭력과 배신, 암약과 살인이 난무하는 세상의 단면이 영화 ‘아수라’(제작 사나이픽쳐스) 안에서 펼쳐진다. 극악한 폭력의 세계에 과객은 시선을 빼앗기고 있다. 개봉 첫날부터 흥행 기록을 세웠다.
보내 내내 긴장을 놓을 틈 없이 휘몰아치는 ‘아수라’는 등장인물을 전부 ‘악인’으로 채운, 심상치 않은 영화다. 주인공인 정우성과 황정민, 주지훈과 곽도원, 정만식 등 개성 강한 배우들이 합작해 남성 관객이 더 열광할만한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2012년 원빈의 ‘아저씨’와 2013년 최민식의 ‘신세계’를 잇는 ‘본격 남성 누아르’가 또 한 편 탄생했다.
<영화 아수라에서 최고의 악인을 연기한 세 배우. 왼쪽부터 황정민, 정우성, 곽도원>
9월28일 개봉한 ‘아수라’는 더 이상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의 영화의 ‘한계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개봉 당일 47만6902명(영화진흥위원회)을 동원하면서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으로 최고 오프닝 기록을 세우기까지 했다. 지난해 11월 이병헌 주연의 영화 ‘내부자들’이 갖고 있던 청소년관람불가 영화의 종전 최고 기록을 두 배 차이로 앞섰고, 상영 3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아수라’의 첫 날 관객 수는 역대 한국영화 기록으로 따져도 8위의 성적이다. 1200만 관객을 동원한 ‘암살’이 바로 앞의 7위에 올라 있다. 첫 날 관객 기록은 향후 흥행 규모를 예측하는 바로미터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아수라’를 향한 기대치는 높다.
○“폭력의 세계에 물든 사내가 괴멸하는 이야기”
‘아수라’는 불교에 등장하는 한 신의 이름이다. 싸움과 다툼을 의미하는 상징어로도 통한다. 영화는 제목이 가진 의미를 충실히 따른다. 도처에 존재하는 악인들의 모습이 마치 먹이사슬처럼 얽힌다. ‘선과 악’의 대결이나 ‘권선징악’의 메시지 따위는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 않은 듯 거친 세상을 비출 뿐이다. 이 같은 구도로 인해 ‘아수라’는 새로운 누아르 장르의 탄생을 알린다.
영화는 재개발을 앞둔 가상의 도시가 배경이다. 불법 정치자금 모금은 물론 살인교사와 마약 밀매에 이르기까지 온갖 악행으로 권력을 취하는 시장 박성배(황정민), 그의 심부름꾼을 자처하는 강력계 형사 한도경(정우성), 시장의 비리를 캐내려고 한도경을 유인하는 검사 김차인(곽도원), 한도경의 후배이자 박성배의 하수인이 되는 문선모(주지훈) 등 처한 상황은 달라도 품은 욕망은 비슷한 남자들이 그 욕망 탓에 함께 얽혀 침몰하는 이야기다. 영화는 한도경의 시선으로 펼쳐진다.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맡은 김성수 감독은 “폭력의 세계에 물든 사내(정우성)가 자기가 저지른 폭력에 의해 괴멸하는 이야기”라고 ‘아수라’를 소개했다. 2시간12분에 달하는 상영시간동안 남자들이 얽힌 거친 액션이 반복되지만 “근사한 싸움으로 보이길 거부했다”고 감독은 말한다. 그 다툼은 악인들의 싸움이기 때문. 김성수 감독은 “통쾌한 액션 보다 통렬한 액션을 그렸다‘고 했다.
감독도, 배우도 ‘작정하고’ 달려든 ‘아수라’에는 오래도록 기억될 만한 장면이 몇 차례 등장한다. 정우성이 벌이는 자동차 추격전이 대표적이다. 액션 장르의 한국영화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필수 장면이지만 ‘아수라’의 표현은 다르다. 여러 대의 자동차가 부서지는 물량공세 대신 치밀한 설계 아래 스타일리시한 장면을 완성했다. 액션에 특화한 감독의 관록과 배우들의 의지가 돋보이는 장면이다.
영화의 후반부 장례식장을 배경으로 20여분 동안 긴박하게 펼쳐지는 아귀다툼 역시 빼놓기 어려운 장면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의미하는 장례식장을 통해 지옥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관객에 적지 않은 충격을 안긴다. 인물들이 맨몸으로 맞붙는 대결, 도끼를 들고 날뛰는 거친 싸움에서는 배우들의 결연한 각오가 느껴지기도 한다.
○주연 정우성·감독 김성수…네 번 째 호흡 ‘우정의 합작품’
‘아수라’는 정우성과 김성수 감독이 네 번째 만나 완성한 영화다. 앞서 700만 관객 흥행에 성공한 ‘밀정’의 송강호, 김지운 감독처럼 이들도 20여 년 동안 우정과 신뢰를 쌓으면서 ‘영화계 동지’로 믿음을 나눠왔다.
첫 만남은 1997년 영화 ‘비트’다. 당시 신인 연기자였던 정우성은 ‘비트’를 통해 일약 청춘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렇게 시작된 둘의 인연은 이듬해 영화 ‘태양은 없다’로 이어졌고, 2000년 영화 ‘무사’까지 연이은 합작품으로 계속됐다. 이번 ‘아수라’는 15년 만의 재회다.
여러 번 함께 영화를 함께 만든 경험, 그렇게 쌓아온 시간의 힘은 고스란히 작품의 완성도로 이어진다. ‘밀정’이 일제강점기 시대극으로서 새로운 시선을 개척한 것처럼 ‘아수라’ 역시 선악의 구도를 벗어나 악과 악의 대결이라는 새로운 누아르를 완성했다.
<영화 아수라의 한 장면>
사실 정우성은 몇 년간 김성수 감독과 영화 작업을 바랐지만 쉽게 성사되지 않았다. 4∼5년 전 함께 영화를 기획해 시나리오 작업에 착수하기도 했다. ‘태양은 없다’의 또 다른 주인공 이정재까지 의기투합했지만 작업이 빠르게 진척되지 않아 결국 이들의 합작은 무산된 바 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 15년 만에 뭉친 이번 ‘아수라’는 서로에게 각별할 수밖에 없다.
정우성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연출자로 김성수 감독을 꼽는다. ‘아수라’에 관한 대략적인 설명만 듣고, 심지어 시나리오도 읽지 않고 선뜻 출연을 결심한 이유도 “믿고 따르는 감독”이라는 신뢰에서 비롯됐다. 정우성은 ‘비트’와 ‘태양은 없다’의 분위기를 잇지만 그보다 성숙한 모습을 이번 ‘아수라’에서 보인다.
‘아수라’를 촬영한 과정을 두고 정우성은 “몸도 마음도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돌이켰다. 그가 맡은 한도경은 박성배 시장의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아픈 아내를 정성껏 돌보는 인물. 이중적인 면모가 뚜렷하다. 뜻하지 않은 극한의 상황으로 빠르게 빠져들기도 한다. 정우성은 영화 속 한도경을 지배하는 감정으로 ‘스트레스’를 꼽았다. 때문에 촬영 내내 그는 “스트레스를 온전히 받아들여 다시 표현하는 일에, 심적으로 견딜 수 없었다”고 했다.
“참기 어려워서 하루는 (김)성수 형에게 ‘정말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런 내 말에 형은 기분이 무척 좋았다더라. 영화에서 나를 지배하는 핵심은 스트레스다. 그 스트레스가 일상의 내게도 영향을 미친다. 개봉을 앞둔 지금도 그렇다. 영화에 빠진 것처럼 헤어 나오기 쉽지 않다.”
○왜 폭력인가…원인 없이 결론만
어찌 보면 ‘아수라’는 남보다 조금 편하게, 더 빨리, 더 많은 것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지옥행’ 열차에 탑승하는 이야기로 보인다. 영화의 결말 자체만 보면 최근 나온 여느 한국영화보다 통렬하지만 잔인한 폭력의 근원을 찾거나 악의 뿌리를 파헤치는 시선은 없다. 지옥행을 예약한 사람들의 면면을 보여주는 데 충실할 뿐이다. 인물 각자의 욕망에 집중하지만 왜 욕망을 갖게 됐는지, 그 욕망을 해결하는 방식은 왜 공통적으로 잔인한 ‘폭력’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담지 않았다.
이야기가 취약한 사실 역시 ‘아수라’의 약점으로 꼽을 만 하다.
인물들이 폭력을 선택한 이유가 없듯이, 각각의 등장인물이 최악으로 치닫는 배경은 무엇인지 유기적으로 맞물리지 않는다. 장르의 새로운 탄생은 높이 평가받지만 이야기의 완성도 면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의견도 뒤따른다.
* 사진제공 : 사나이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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