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 게시요건 확인]
1970년대에 한창 미국과 영국의 팝송을 듣던 시절에 우리 대중가요는 부지런히 서구 팝의 수준을 따라가느라 분주했다. 이 시기에 음악을 좀 한다거나 안다거나 하는 사람, 즉 음악가와 팬들 중에서 외국 팝을 듣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들에게 팝은 ‘음악 높이’를 재는 척도나 준거 역할을 했다. 팝은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라디오 프로그램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영어로 된 팝송만을 내보냈다. 그때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 노래는 과연 외국에 나가서 어필할 수 있으려나? 서양의 음악 팬들이 우리 가수를 좋아하는 그날이 올 수 있을는지...”
놀랍게도 30년 정도가 흐른 2000년대에 와서 이것이 실현되었다. 1980년대 중후반 조용필과 나훈아 등 몇몇 가수가 일본과 홍콩 등지에서 인기를 누리는 ‘소수 개별’ 수준이 아니라 많은 아이돌 댄스가수들이 동남아시아와 구미 시장을 공략하는 ‘다수 집단’ 흐름으로 우리의 대중음악이 바깥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K-Pop이라는 국가정체성이 탑재된 어휘부터가 글로벌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아직도 국내 기성세대들은 한류와 K-Pop 가수의 해외 시장정복을 믿지 않는다. 홍콩에서 개최되는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즈(MAMA, 마마)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리는 KCON(대규모 K-Culture 컨벤션) 공연장에 현지 관객들이 몰려들었다는 소식을 접하면 ‘기껏 해외교포들이겠지..’하며 서양 관객이 한국 가수에 열광한다는 사실을 의아해 한다. 우리 아이돌 그룹이 북경, 홍콩 그리고 파리와 런던에 출현하면 공항 직원들이 일손을 놓아 공항업무가 마비된다는 얘기를 들으면 “정말 그래?”하고 의구심으로 반응한다.
‘KCON 2016 LA’ 공연장을 가득 채운 팬들의 모습 ? 출처 : CJ E&M
K-Pop은 탁월한 댄스실력, 비주얼, 노래솜씨 그리고 기획사의 노력 등이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세계로 확산 중이다. 미국 보스톤 소재의 명망 높은 버클리 음악대학이 올해 5월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한 것은 한국인 재학생이 많은 것 외에 부쩍 위상이 제고된 K-Pop의 존재감도 부분적으로 작용했다. 버클리 음대 관계자는 “근래 월드음악 시장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음악은 K-Pop이다. 싸이는 물론이고 투애니원, BTS(방탄소년단) 등 아이돌 그룹 한 둘 쯤은 언급하는 게 기본이 됐다.”고 말했다.
신중현의 명예 박사학위 수여 장면 ? 출처 : 신대철 페이스북
가장 중요한 성과는 이제 한국의 대중음악이 한국인만의 것이 아니라 세계인이 공유하는, 국적 초월의 진정한 ‘세계 대중음악의 언어’로 승승장구 중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마치 그 상승과정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글로벌 대중음악이 된 ‘아메리칸 팝’이나 ‘브리티시 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권위를 내건 빌보드 차트에 일본 대중음악(J팝)보다 우리의 K-Pop 소식이 훨씬 자주 그리고 정기적으로 다뤄진다는 점이 말해준다.
우리가 노력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규모와 디테일 측면에 있어서 장족의 발전을 거듭한 국내 엔터테인먼트 기획사의 전향적 접근이 으뜸이다. 이들이 흐름에 발맞춰, 아니 때로는 그것을 주도해 꾸준히 기획의 외연 특히 국가적 확장성을 꾀하면서 K-Pop이 세계 대중음악으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우리 기획사는 애초 1990년대 초중반해도 우리 아이돌의 댄스, 가창, 외모를 비롯한 우수한 역량과 들불처럼 번진 한류의 붐을 믿었다. 그리고 거기서 댄스 콘텐츠의 국적불문 성장잠재력을 확인했다.
2000년 한류라는 흐름을 이끌어낸 에쵸티(H.O.T)의 북경콘서트는 폭발적 전기를 마련했다. 이후 무수한 아이돌 그룹들이 중국과 동남아에 진출했다. 이 때만해도 ‘문화의 쌍방향 교류’라는 기치는 단지 학술적 용어였지 당장 실현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 가수들을 해외에 내보내면 그만이라는 사고에서 탈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 아시아 지역의 국가 혹은 시장과의 ‘협치(協治)’를 전제하지 않으면 이 흐름은 결코 견고해질 수 없다는 새로운, 조금은 반성적 인식에 도달했다.
한류의 새로운 흐름을 만든 H.O.T의 북경 콘서트 ? 출처 : 비커즈 블로그
2002년 보아가 일본시장에 들어가 현지 기획사인 ‘에이벡스’의 홍보와 마케팅에 의해 성공의 방점을 찍으면서 ‘국적’에 대한 개념은 달라졌다. 일본의 평단은 이 무렵 “상대적으로 자연스럽게 일본에서 보아가 성공한 것은 한국가수가 아니라 일본가수라는 느낌을 일본 관객들에게 부여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어느 나라 출신이라는 그 국적성이 갖는 의미가 소멸한 것은 아니었어도 상대적으로 ‘약화’된 것은 분명해졌다.
일본 잡지의 표지모델로 선 보아 ? 출처 : Catwalking 블로그
이때부터 우리의 가요기획사는 해외 진출을 겨냥해 그 국가와 파트너쉽을 구축하는, 이른바 쌍방향적 사고를 실현해 현지의 음악지망생들을 우리 멤버들과 함께 엮어 ‘다국적’ 그룹을 만드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동남아에서 최고 인기그룹으로 통하는 투피엠(2PM)의 일곱 멤버 가운데는 태국 출신의 미국인 ‘닉쿤’이 포함되어 있다. 이제 국내 음원차트에 히트곡을 올리는 ‘핫’한 이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에서 2PM이 최강의 인기를 누리는 것은 ‘태국의 영웅’ 닉쿤 덕도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YG 기획사의 야심작인 ‘블랙핑크’에서 댄스 전문 멤버 리사도 태국인이다.
2009년 태국 스페셜 에디션으로 발매된 2PM의 앨범
2PM 이후 상당한 그룹들이 외국 출신 K-Pop 지망생을 멤버로 끌어들였다. 수지가 있는 기획사 JYP 소속 ‘미스에이’에는 중국인 멤버 ‘페이’가 있고, 계약이 종료되기 전 4인조였을 때의 멤버 ‘지아’ 역시 베이징학교에서 열린 JYP 오디션을 통해 팀에 합류했다. 이처럼 현재 우리 기획사들은 수년 전부터 공식적인 해외 탤런트 스카우트 방식으로 외국인 구성원을 선발하고 있다. 아예 다국적 그룹으로 출범한 SM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에프엑스(F(x))는 중국 칭다오 출신 ‘빅토리아’와 대만 출신 미국인 엠버 등 두 명이 외국인이다. 에프엑스 멤버이자 소녀시대 ‘제시카’의 친동생 ‘크리스탈’ 역시 한국계이지만 국적은 미국인이다. 다섯 중 셋이 외국인인 셈이다. 이외에 ‘갓세븐’(GOT7)의 ‘잭슨’과 ‘피에스타’의 ‘차오루’ 그리고 엠넷의 <프로듀스101> 프로그램을 통해 결성된 ‘아이오아이’(I.O.I)의 ‘주걸경’도 중국인이다. 열셋 소녀들로 구성된 그룹 ‘우주소녀’에도 성소, 미기, 선의 등 중국인이 셋이나 된다.
GOT7의 미국 투어 콘서트 포스터 ? 출처 : GOT7 공식 페이스북
K-Pop의 최종 공략지점을 중국으로 삼는 SM은 이미 그룹명에서 지향점을 읽을 수 있는 ‘동방신기’에 이어 현재 아이돌 최강으로 군림한 ‘엑소’를 2010년 처음 구상할 때 야심차게 중국 공략을 위해 ‘엑소 K’와 더불어 ‘엑소 M’(만다린의 M으로 중국을 의미한다)을 짰고, 여섯 멤버 중 넷을 중국인으로 채웠다. 중국 내 이들의 주가가 급상승하면서 나중 중국인 멤버 ‘크리스’, ‘루한’, ‘타오’ 등 셋이 중국 기획사의 공작에 휘말려 탈퇴해 아쉽게도 이제 중국인인 ‘레이’ 하나만 남았지만 엑소가 단기간에 중국 청소년들 사이에서 최고 인기그룹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자국인이 넷이라는 게 이유였음은 명백했다.
음악 강국으로 일컬어지는 미국과 일본 멤버가 아이돌 댄스그룹에 포함된다는 것은 K-Pop의 글로벌 위상을 가리키는 증거로 내놓기에 충분하다. JYP의 회심작답게 지난해부터 올해에 걸쳐 현재까지 ‘우아하게’, ‘Cheer up’, ‘TT’, ‘Knock knock’, ‘시그널’ 등 다섯 곡 연속 대박을 치고 있는 ‘트와이스’는 대만 출신의 ‘쯔위’ 말고 일본인이 ‘모모’, ‘사나’, ‘미나’ 등 셋이나 있다. 국내 틴에이저 걸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누리는 ‘세븐틴’의 멤버 ‘버논’이 미국인이며 ‘슈퍼주니어 M’의 ‘헨리’가 캐나다 출신이라는 점은 앞으로 구미 출신의 음악지망생도 속속 K-Pop에 합류할 것임을 예고한다. 하지만 둘은 아시아계이지 정통 구미 혈통의 인물은 아니다. 만약 유럽, 남미와 북미 출신이(아마도 우리는 미국 출신에 가장 의미를 두겠지만) 아이돌 댄스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것이 보편화된다면 K-Pop의 무국적성과 세계성에 방점을 찍을 수 있을 것이다. 논리적으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개연성은 충분하다.
말이 K-Pop이지 지금까지라도 이미 국적은 ‘코리아’를 넘어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것은 K-Pop의 자체 확산을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일체감 넘치는 강력한 댄스를 필살기로 하는 K-Pop이 글로벌 공유 콘텐츠로 승격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미영 팝과 라틴 음악의 세계성에 도전하는 형국이다. 동남아와 극동은 말할 것도 없고 구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청소년들이 K-Pop의 원초적 매력에 사로잡혀 그 일원이 되고 싶은 열망의 산물이다.
적어도 K-Pop, 만약 그것이 아이돌 댄스에 국한되는 것이라면 국적 초월의 가능성은 이미 실현되었다. ‘솔리드’의 김조한이나 ‘지오디’(god)의 박준형, 윤미래와 바비킴 등 1세대 교포영입에서 시작해 상기한 것처럼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계 외국인 영입, 구미 출신 한국계 외국인의 영입 등으로 진전되는 흐름은 마침내 ‘한국인이 없는 K-Pop 그룹’인 ‘이엑스피 에디션’(EXP Edition)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미국, 크로아티아, 포르투갈 출신으로 이뤄진 이 그룹은 실로 K-Pop은 한국인의 것이 아닌 전(全) 지구적 콘텐츠로 상향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징표가 아닐 수 없다.
뿌듯한 일이다. 외국 것만을 선망해온 기성세대들은 우리 것을 선망하는 외국을 보면서 의아해 할 것이다. 하지만 K-Pop의 진정한 국적초월은 아이돌 댄스그룹에 외국인들이 포진했다고 해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이엑스피 에디션’은 어디까지나 특이한 사례이고 외국인이 포함된 그룹에서 외국인의 음악적 위상이 한국인 멤버의 존재감과 맞서거나 추월하는 상황은 목격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용병’의 단계에도 이르지 못하는, 솔직히 아직까지는 디스플레이 이를테면 전시(展示) 수준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국적에 대한 관념 자체를 넘어서는 것은 구성원 진열이 아니라 콘텐츠의 흡인력에서 비롯된다. 세계의 음악팬들에게 ‘음악’을 통한 지속적인 감동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세계성은 확보할 수가 없다. 한국인 외에 다른 나라 출신의 멤버가 있다고, 아니 아예 한국인이 없는 그룹이 나왔다고 그 외적인 상황이 ‘월드와이드’를 가져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음악은 음악을 하는 사람의 외적 신상과 스펙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는 음악의 공감 창출력에 달려 있다. 기성세대의 바람처럼, 서양을 비롯한 딴 나라의 음악 팬들이 진정으로 우리 가수와 K-Pop의 음악성을 좋아하는 그날이 왔다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현재의 형식적 진전은 인상적이지만 K-Pop의 국적초월 가능성은 아직도 멀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음악의 다양화를 꾀하지 않고는 어렵다. 우린 더 나아가야 한다.
성명 : 임진모
약력 :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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