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은 어떻게 정해졌을까?
- 설의 의미에서 구정-신정, 양력-음력, 달력의 기원까지 -
설-새해, 구정-신정 제각각 불러도 결국 하나의 의미인 이 명절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고, 또 어떻게 정해진 것일까? 설을 이해하면 역사 속 음력-양력을 알게 되고, 더 거슬러 태양력과 태음력이라는 달력의 기원까지 볼 수 있다. 알고 보면 참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우리의 명절 이야기.
정월초생(正月初生)을‘설’이라 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설이라 함은 보통으로는 ‘슬프다’는 뜻이지만 옛날에는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는 의미로도 쓰는 말이니 ‘설’이라 ‘설날’이라 함은 곧 기우(杞憂 - 기서는 ‘보다 예민하게 삼가다’의 뜻이다_글쓴이)하기 위하여 가만히 들어 앉은 날이라는 뜻입니다. 옛날 풍속에 무슨 중대한 일이 있으면 그 일이 아무 탈없이 순하게 성취되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가지고 혹시라도 부정한 일이 있을까 봐 기우를 대단히 하였습니다. (중략) 1년 365일의 처음이 이 날을 극진히 조심하고 지내며 (중략) 이 때문에 정월초생을 ‘설’이라 하고 특히 초하룻날을 ‘설날’이라고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 최남선, <조선상식문답>, 동명사, 1946에서
조선상식문답_설에대해서 ⓒ 국립중앙도서관
조선상식문답_속표지 ⓒ 국립중앙도서관
최남선은 해방 전인 1937년 1월 30일부터 9월 22일까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160회에 걸쳐 ‘조선상식’을 연재한다. 오늘날 새해가 돌아오면 신문이고 방송이고 잡지고 입 모아 외치는 ‘설날은 삼가고 조심하는 날’의 출처가 바로 여기다. 이 밖에 ‘낯설다’에서 ‘설’을 떼어내 ‘해가 바뀌어 아직 낯선 날’이라고 설명하는가 하면, 설날을 동사 ‘서다’에서 유추해, ‘선날’ 곧 개시(開始)의 의미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세 가지 설명 모두 똑 떨어지는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함은 비등비등이다. 설명하기 위해 굳이 설명을 더하는 행동 자체가 인류학 탐구 대상이긴 하다. 아무려나 좋은 뜻만 간추려 새겨본다. 삼가고 삼가라, 낯선 한 해가 이제 시작이다!
설에 잇닿은 차례, 세배, 덕담, 떡국을 비롯한 세찬 등의 다양한 명절 풍습이 많지만 좁은 지면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으니 어원을 따지다 미처 못 본 새해 ‘1월 1일’의 또 다른 각을 살펴보면서 명절을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먼저 설, 설날. 더 보태고 뺄 것 없는 새해 첫 날이다. 그런데 이 ‘새해 첫 날’은 또 어떻게 정해졌을까? 새해 첫 날을 엄밀한 용어로는 ‘정삭(正朔)’이라고 한다. 정(正)은 한 해의 시작을 뜻하고, 삭(朔)은 한 달의 시작을 뜻한다. 사실 새해, 첫달, 첫날은 사람이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었다. 실제로 기원전 1000년대의 시간을 아우른 중국 고대의 세 왕조 하, 은, 주의 정월은 저마다 달랐다. 하의 정월은 태음력의 정월이었다. 은의 정월은 태음력의 12월이었고, 주의 정월은 태음력의 11월이었다.
달력은 공동체의 기억과 역사 기록의 근거가 되는 엄정한 물리적 실제다. 사람과 사람의 약속, 개인과 사회의 약속, 상행위, 법률과 행정, 개인과 사회의 기념일, 역사적 기억, 역사 기록이 모두 여기에 잇닿아 있다. 앞서 정삭은 사람이 조정할 수 있다고 했지만,사람 가운데서도 권력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고대 왕조는 왕조가 교체될 때 달력을 바꿈으로써 누가 사람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는지를 분명히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복잡한 변화와 개정이 이어졌지만 동아시아 세계는 차츰현재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태음력을 쓰게 됐다.
달의 변화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태음력 ⓒ 위키미디어
* New Moon : 초승달이 뜨는 무렵 / First Quarter : 상현 / Full Moon : 보름달 / Last Quarter : 하현
* Waxing crescent : 초승달 / Waxing gibbous : 달이 커지는 시기 / Waning gibbous : 달이 작아지는 시기 / Waning crescent : 그믐달
한마디로 태음력이란,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시간을 기준으로 만든 역법이다. 태음력의 1년은 열두 달이고, 열두 달은 29일의 작은달과 30일의 큰달로 나뉜다. 그리고 30년에 11일의 윤일이 있다. 아주 오랜 시간을 두고 우리 겨레 역사상의 설날은 바로 이 태음력의 1월 1일이었다.
달력 사용의 변화는 세계사의 변화와 함께 왔다. 일본은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태양력을 채택했는데, 때는 1873년이었다. 태양력이란 달이 기준인 태음력과 달리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을 1년으로 정한 역법이다. 1년은 365일이며 4년마다 윤년을 두었다. 태양력을 대표하는 달력은 로마제국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제정한 율리우스력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1502~1585)가 개정한 그레고리력이다. 일본이 받아들인 태양력이 바로 그레고리력이며, 이는 오늘날 전세계에 통용되는 달력이기도 하다.
조선의 지배계급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과 1895년 민비 살해를 겪으며 오금이 저렸다. 갑오개혁이니, 을미개혁이니 하며 이른바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하던 조선 조정은 결국 달력을 바꾸는 충격요법을 선택한다. 조선 고종은태음력으로 1895년 9월 9일, ‘정삭(태음력의 새해 첫날)을 고쳐 태양력을 쓰되 개국(開國) 504년 11월 17일을 505년 1월 1일로 삼으라’는 명을 내린다. 이윽고 태음력 1895년 11월 17일이 오자 이 날이 태양력(그레고리력) 1896년 1월 1일과 교체되었고, 이후 조선의 공식적인 달력과 시간은 태양력을 따르게 되었다.
이때부터다. 하루아침에 정삭이 바뀐 것이다. 겨레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동아시아 사람들과 함께 줄곧 써온 태음력은 구력(舊曆)이 됐다. 태양력은 공식 달력이자 신력(新曆)이 됐다. 이에 따라 음력 1월 1일은 ‘구정(舊正)’이 됐고, 양력 1월 1일은 ‘신정(新正)’이 됐다. 그러나 풍습은 쉬이 변하지 않는 법이다. 풍속의 관성은 대단하다. 일상생활에서 음력과 양력 간의 혼란은 이어졌고, 조선 사람들은 양력 1월 1일에는 아무래도 명절 기분이 나지 않았다. ‘이중과세(二重過歲)’, 곧 설을 양력에 한 번, 음력에 또 한 번 이중으로 쇠는 일상의 풍경은 이때 이미 태어났다. 1899년 02월 15일 <독립신문>은 ‘두번과세’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중과세를 이렇게 비판했다.
독립신문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대한신민들이 양력으로 이왕 과세들을 하고 또 음력으로 과세들을 하니 한 세계에 두 번 과세한다는 말은 과연 남이 부끄럽도다.”
이중과세는정삭을 바꾼 주체인 조정도 마찬가지였다. 1907년 12월 20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순종에게 아뢰었다.
“국가의정삭은 이미 태양력을 준수하여 쓰고 있습니다. 원단에 조하(朝賀, 신하들이 조정에서 임금에게 축하의 예를 갖추는 일_글쓴이)의 의식을 거행해야 하니 음력 원단과 동지의 조하 의식은 이제부터 하지 않는 것으로 계획을 세워보면 어떻겠습니까?”
순종은 이를 재가했다. 1896년 이래 1907년까지도 음력 설날과 동지의 조하를 이어갔다는 이야기다. 이야말로 이중과세가 아니고 무엇인가. 오늘날까지도 한국인 또는 동아시아 사람들의 일상에서 태양력과 태음력 양쪽에 걸쳐 있는 설, 설날에 깃든 역사가 이렇다. 참고로 중국은 청제국을타도하고 중화민국을 수립한 1912년 1월 1일부로 태양력을 공식 달력으로 채택했다. 이렇게 해서 동아시아 세 나라의 정삭이 모두 태양력을 따라 바뀌었다.
한 해의 시작은 지구상 어떤 나라, 어떤 민족에게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뜻깊은 날이다. 의례와 잔치와 연희와 별식이 없는 1월 1일은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이 뜻깊은 정삭은 역사의 추이, 세계적 체제 변화의 추이와 발을 맞추게 마련이다. 만물은 연결돼 있고 일상은 역사의 산물이다. 1월 1일은 일상과 역사를 함께 음미하기에도 참 좋은 날이다.
* 자료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위키미디어
- 글 : 문헌연구가 고영
고영 칼럼니스트
● 사단법인 끼니 이사 ● 저서 - <다모와검녀><샛별 같은 눈을 감고 치마폭을 무릅쓰고 심청전><아버지의 세계에서 쫓겨난 자들 장화홍련전><높은 바위 바람 분들 푸른 나무눈이 온들 춘향전>
출처 사단법인 끼니
[출처 : 문화포털 - 저작권 조건 확인] (2016.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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