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을 뛰어넘는 열풍이다. 영화 ‘부산행’의 흥행 속도가 거침이 없다. 개봉 전부터 긍정적인 흥행 전망은 나왔지만 실제로 영화가 공개된 이후 관객의 반응은 기대를 뛰어넘는 수준이다. 20일 개봉한 영화는 2주째에 접어든 26일 누적관객 600만 명을 돌파했다.
‘부산행’은 이미 상영 나흘째에 ‘명량’을 뛰어넘어 역대 일일 최다 관객(128만738명)을 기록했다. 이 같은 추세에 힘입어 영화계에서는 “1000만, 그 이상도 거뜬하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낯선 좀비 소재, 상업영화 연출은 처음인 감독이 만든 ‘부산행’은 어떻게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무엇이 이토록 관객을 열광케 하고 있을까.
<영화 '부산행'의 한 장면 / 사진제공 | NEW>
● 좀비 소재의 신선함, 현실 반영한 비판적 시선
제작비 100억 원 규모의 ‘부산행’은 국내 상업영화에서 처음 다뤄지는 좀비 소재의 영화다. 좀비는 그동안 할리우드 영화의 캐릭터로 간간히 만나왔을 뿐,국내 관객에는 낯선 존재로 통했다. 하지만 그 낯선 존재가 곧 신선함으로 작용하면서 새로운 볼거리를 원하는 관객의 요구를 정확히 겨냥했다.
‘부산행’이 그리는 좀비는 ‘유령’이 아니다.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괴 바이러스에 감염된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 감염자들은 삽시간에 좀비로 변해 멀쩡한 이들을 공격한다. 감염의 원인을 알 수 없고, 그들이 왜 공격성을 띄는 지 명쾌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영화에서 인과관계는 중요치 않다. 영화는 단지 좀비로 변하는 사람들, 그들이 한 데 얽혀 만들어내는 혼돈에 주목한다.
연출을 맡은 연상호 감독이 좀비를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먼저 “이색적인 소재”이자 “여러 사회적인 함의를 담고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그는 앞서‘돼지의 왕’, ‘사이비’ 등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온 독립영화 감독 출신이다. 애니메이션을 통해 여러 해외 영화제에 진출하는 성과를 내면서 주목받았고, 기대를 받으며 2014년 또 다른 애니메이션 ‘서울역’을 완성했다. 지금의 ‘부산행’이 탄생할 수 있던 배경이자, 모태가 되는 작품이다.
애니메이션 ‘서울역’은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사람들이 좀비로 변화하는 과정을 그린다. 배경은 서울역으로 한정돼 있다. 상당한 완성도를 갖춘 ‘서울역’을 확인한 투자배급사는 이를 실사영화로 확장해보자고 제안했다. 감독은 그 제안에 응했다. 연상호 감독은 “‘서울역’은 직설적이고 어두운 영화이지만 거기에 개인적인 감수성을 가미한다면 실사 상업영화로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며 “부산행‘의 시나리오를 쓸 때 관두고 싶던 순간이 많았지만 영화를 좋아하던 원초적인 마음으로 돌아가 누구나 재미있게 보는 영화를 만들려 했다”고 밝혔다.
물론 좀비의 등장만이 ‘부산행’ 열풍을 설명할 수는 없다. 긴장을 놓을 틈조차 주지 않고 진행되는 재난 블록버스터의 속도감, 재난의 상황을 우리 사회에 그대로 대비해 볼 수 있도록 여러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연출 역시 흥행의 이유를 설명해준다.
실제로 개봉 이후 다양한 반응을 얻는 ‘부산행’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와도 비교되고 있다. 공통점이 여러 부분에서 포착되기 때문이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폐쇄된 기차, 위기에서 벗어나려 앞 칸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두 영화의 설정은 비슷하다. 확실한 차이도 있다. ‘설국열차’가 목적지 없이 반복해 달리는 기차를 내세운다면 ‘부산행’은 종착지가 분명하다. 과연 열차는 부산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 부산은 좀비들의 침범에서 자유로운지, 대체 누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을지, 관객들은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다. 종착역이 있기에 가능한 설정이고 긴장이다.
좀비 소재, 재난 장르의 특성상 20~30대 젊은 관객의 지지가 높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부산행’은 40~50대 중장년 관객의 선택 폭도 넓다. 그만큼 다양한 세대가 보고 즐길만한 영화라는 의미다. 영화가 견지한 사회 비판적인 시선이 여러 세대의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하나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주인공 공유의 극 중 직업은 펀드매니저다. 영화에서 그는 일반 투자자를 “개미”라 부르고, 그들의 전화번호는 휴대전화 속 ‘개미들’이라는 폴더에 저장해 두고 있다. 또 다른 등장인물인 마동석은 그런 공유를 향해 “개미의 피를 빨아먹는 사람”이라고 비난한다.
공유의 직업은 왜 펀드매니저이어야 했을까. 여기에는 연상호 감독의 주관 그리고 계산이 담겼다. 감독은 “영화에서 계급 관계를 다룰 때면 위에 있는 사람보다 실제 나처럼 밑의 사람들에 더 주목하게 된다”고 했다. ‘부산행’에서 굳이 공유를 펀드매니저로 설정한 이유도 그렇다. 감독은 “성장 중심의 시대에 우리가 다음 세대에 무엇을 남겨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며 “그 일환으로 성장을 상징하는 펀드매니저라는 직업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영화 '부산행'의 한 장면 / 사진제공 | NEW>
●연상호 감독 “사회의 계급에 주목하려 한다”
연상호 감독이 지금 맞고 있는 상황은 드라마틱한 성공 스토리에 어울린다. 영화가 새로운 기록을 세울수록 감독을 향한 관심 역시 뜨거워지고 있다. 사실 그는 3년 전만 해도 주류에서 조금 비껴난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이었다. 지금은 매일 1700개에 이르는 스크린을 차지하고 있지만, 3∼4년 전에는 자신의 영화를 소개할 상영관을 확보하는 것조차 힘겨운 상황이었다. 그렇게 2011년 내놓은 ‘돼지의 왕’은 관객 1만9000명, 2013년 ‘사이비’는 2만2000명을 모았을 뿐이다.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쳤다. “중학생 때 처음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었다”는 연상호 감독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대단해 보였고 그렇게 유명해지고 싶었다”고 말했다. 막상 미술학원에 가보니 꿈보다 입시가 급선무가 됐다. 원하는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다른 대학에 입학한 그는 “허세 비슷한 마음으로”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아티스트로 살겠다고 다짐했다”고 돌이켰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면서 애니메이션 작업을 시작해2002년 처음으로 ‘지옥’이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그로부터 다시 10년여가 흐른 뒤 애니메이션에서 실사영화로 자신의 위치를 전화하는 과정에서는 “내적인 갈등을 겪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자신감이나 가치관까지 잃은 것은 아니었다. 앞서 애니메이션에서 다룬 ‘계급’의 문제를 그는 100억원대의 블록버스터에서도 잇고 있다. “개인이 가장 많이 접하는 문제, 개인을 가장 많이 건드리는 문제, 내가 계속 견지하려는 문제가 바로 계급의 문제”라고 그는 말했다.
“어릴 땐 누구나 특별한 사람이 될 거라 믿지 않나. 그러다 학교에 가고 사회로 나아간다. 하지만 그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여지없이 깨진다.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계급의 문제는 나를 괴롭히기도 했다.”
연상호 감독은 ‘부산행’에 이어 또 한 편의 실사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새 영화는 “블랙코미디 장르의 영화”라고 소개했다.
성명 : 이해리
약력 : 스포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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