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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Inside

내 나이가 어때서, 나는 할머니다(2017.10.18)

[ 출처 :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 게시요건 확인]  

“도전하고 싶어 나이 칠순에도, 시간이 지나도 열정은 팔 순 없어.”


힙합을 젊은이들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작년 <힙합의 민족>(JTBC)에선 여든살 배우 김영옥이 힙합에 도전했다. 일흔의 원조 할미넴 최경주씨 외에 6명의 할미넴들도 래퍼들과 함께 신명나는 무대를 만들었다. 머리엔 서리가 내려앉았고, 얼굴엔 세월의 흔적이 깊게 패어있었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뜨거웠다.




2017년 8월말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725만, 전체 인구 대비 14%를 넘어서면서 고령사회로 진입했다.  UN이 정한 기준에 의하면 만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7%를 넘으면 고령화사회, 14%를 넘으면 고령사회, 20% 이상이면 초고령사회로 분류한다. 의료기술의 발달은 무병장수를 향한 욕망을 실현가능한 꿈으로 만들었고, 경제적 여유는 접어두었던 꿈을 이룰 수 있는 물적 토대가 되었다. 아흔의 모델이 런웨이를 걷고, 여든의 배우가 스크린을 누비고, 일흔의 할머니가 유튜브를 하는 시대, 지금 할머니들이 변하고 있다.



드라마 속 할머니, 편견을 깨며 고정 관념을 넘어 
TV 드라마 속에는 여러 유형의 할머니가 등장한다. 혈연관계를 기준으로 본다면 푸근하고 정 많은 외할머니와 아들을 선호하는 친할머니가 있고, 재력 관계로 본다면 축적된 부를 배경으로 자신의 삶을 향유하는 부자형 할머니와 노년까지 일을 해야만 하는 생계형 할머니가 있다. 권력 관계로 본다면 경제적 능력이나 사회적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자손들에게 당당한 군림형 할머니와 아버지, 남편에 이어 아들 딸 손주에게 마저도 순종적인 복종형 할머니가 있다. 하지만 이들의 삶 어디에도 자기 자신을 위한 주체적인 무언가는 보이지 않는다.


1970년 인기 드라마 <아씨>(1970, TBC)에 등장한 할머니(복혜숙)는 전통적인 남존여비 사상을 갖고 있는 고집 쎈 노인네였다. 22년 장수드라마 <전원일기>(1980, MBC)의 할머니(정애란)는 손주 손녀들에겐 푸근했지만 집안의 위계질서를 잡을 땐 단호했다. 이 당시 드라마 속 할머니들은 쪽진 머리에 한복을 입거나 유행과는 무관한 무채색 옷에 꼬불꼬불 파마머리를 했다. 아무리 엄한 성격이어도 남편이나 아들 앞에선 자신을 낮추는 전통적 모습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냉전체제의 종식과 탈 이데올로기 시대로 돌입하면서 드라마 속 할머니가 새롭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 변화를 가장 잘 반영한 것이 시트콤이었다. 미국 이민 사회를 배경으로 한 (1995, SBS)에 등장했던 할머니(여운계)는 기존의 할머니와 달리 귀엽고 유쾌했다. 호기심과 도전 정신이 강했던 그녀는 새로운 할머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이런 변화는 <순풍 산부인과>(1998, SBS) 미달이 할머니(선우용녀)에게서도 보였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귀여운 애교쟁이였고, 딸과는 자매 같고, 손녀와는 친구 같은 관계였지만 가족들이 지치고 힘들 땐 넉넉한 품을 내주는 전통적인 할머니였다. <남자 셋 여자 셋>(1996, MBC)의 하숙집 할머니(김용림)도 현대적이고 세련된 모습으로 기존의 하숙집 할머니 이미지를 탈피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1999, MBC)에서는 황혼의 이혼과 재혼을 여성의 입장에서 경쾌하게 그려내면서 전통적인 부부 관계의 변화를 예고했다. 이후 할머니들은 낡은 편견에 도전해나갔다. <올드미스 다이어리>(2004, KBS)에 등장한 할머니 3인방 (김영옥, 한영숙, 김혜옥)은 가족들을 위해 무조건적인 희생을 감내하지 않았다. 부당한 남녀 관계와 시대적 소외감에 유쾌하면서도 당당하게 맞섰다. <거침없이 하이킥>(2006, MBC)의 할머니(나문희)도 가부장적 권위와 고정적인 남녀 관계의 틀을 깨고자 했다.


그리고 <디어마이 프렌즈>(2015, tvN)는 할머니들의 오늘을 정면으로 들여다보았다. 김영옥, 나문희, 김혜자, 윤여정, 고두심, 박원숙 등 예순이 넘은 베테랑 배우들이 보여준 노년의 삶은 많은 상처를 안고 있었지만 희망적이었다. 죽을 날 만 기다리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 남은 시간이 다하는 순간까지 자신이 삶의 주인임을 잊지 않으려는 모습 속에 편견을 깨고 고정 관념을 넘어온 그들의 인생이 오롯이 들어있었다.


넓어지는 할머니들의 활동 무대
1996년 한 고추장 광고에 특이한 인물이 등장했다. “고치장 비밀은 매느리도 몰라, 아무도 몰라.” 투박한 사투리, 꼬불한 파마머리를 한 마복림 할머니는 전문 모델이 아니었다. 평범한 일반인을 광고 모델로 한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지만 광고는 성공했다. 이후 광고엔 전문 모델이 아닌 일반인 할머니 모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마복림 할머니 효과가 아니었을까 싶다.
사실 여자라면 멋진 옷 입고 런웨이를 걷는 모델이 되고픈 꿈을 한 번 쯤 꿔봤겠지만 깡마른 체구를 유지하기 위해 혹독한 다이어트와 관리가 요구되는 모델은 그림의 떡이었다. 그런데 그 영역에 할머니들이 도전하고 있다. 


  지난 5월 청계천에서 열린 패션쇼 무대엔 우리나라 최고령 모델인 아흔 한 살의 박양자 할머니가 무대에 올랐다. 그녀는 젊은 시절부터 활동해온 모델이 아니다. 옷에 대한 관심은 많았으나 평범한 주부로 살다가 남편이 세상을 떠난 몇 년 뒤 모델이 되었다. 그녀의 첫 무대는 2007년이었다.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반듯한 자세로 무대 위를 걸어가기 위해 꾸준한 운동으로 체력을 관리하고 있다고 있다는 10년 경력의 그녀는 벌써 90회가 넘는 무대에 섰다. 100세가 되어도 모델이고 싶다는 그녀는 할머니들에겐 희망의 아이콘이다.


  


아흔에 가수가 된 할머니도 있다. 길원옥 할머니는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했지만 위안부 피해자라는 아픈 과거 때문에 자신의 꿈은 펴보지도 못한 채 살아왔다. '내가 좋아하니까 남들이 싫어하건 말건 노래하는 게 직업이다 싶어요“ 라는 그녀는 지난 8월 「길원옥의 평화」라는 음반을 내놓았다. 늦었지만 자신이 소망했던 가수가 된 길원옥 할머니는 대한가수협회로부터 명예 가수 회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유튜브 스타도 있다. 올해 일흔 하나인 박막례 할머니는 유튜브 채널 <박막례 할머니 Korean Granma> 채널을 손녀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정기 구독자 31만, 편당 평균 조회수 45만을 넘은 지 오래다. ‘치과 들렀다 시장 갈 때 메이크업’은 197만, ‘계모임 메이크업’은 116만, ‘아이린 CF 패러디’는 109만의 조회수를 기록한 파워 유튜버다. 카메라 앞의 그녀는 거침없다.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유쾌한 모습으로 화장을 하고 이야기를 한다. 치매 예방을 위해 시작했다는 유튜브 방송, 얼마 전 한 홈쇼핑 채널에서 ‘막례쇼’가 방송될 만큼 그녀의 인기는 상승중이다.


할머니 먹방 중에는 올해 여든인 박영원 할머니의 <영원씨 TV>가 압도적이다. 정기 구독자 12만, 편당 평균 조회수 19만이다. 뿐만 아니라 정기 구독자 22만의 <공대생네 가족>에는 자칭 우주 최강 깜찍이 할머니인 일흔 하나의 이경자 할머니가 꾸밈없는 일상을 보여주고 있다. 할머니 유튜버들의 방송은 아날로그 감성과 디지털 소통 기재가 만들어낸 최고의 합작품이다. 
해외에서도 할머니들의 활동은 활발하다. 걸그룹이라면 어린 소녀들을 생각하겠지만 일본의 걸그룹 'KBG84'는 할머니 걸그룹이다. ‘KBG84' 멤버는 일본 오키나와 코하마 마을 할머니들이고 평균 연령 84세, 최고령 멤버는 97세다. 이 그룹에 들어오고 싶다면 80세가 넘어야 한다. 만일 80세가 안되었다면 연습생그룹에 들어가야 한다. 간단한 율동에 맞춰 오키나와 민요를 노래하며 일본 각 지역 순회공연을 하던 이들은 2011년부터 도쿄에서 라이브 공원도 하고 있다. 비관적이고 우울한 시간으로 점철될 수 있는 노년의 시간에 활력을 불러일으킨 ’KBG84'는 노인들의 삶에 활동성을 부여해줄 해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글로벌 명품 브랜드도 할머니 바람을 피해가진 않았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 셀린느(CELINE)는 광고캠페인에 여든이 넘은 작가 ‘존 디디온(Joan Didion, 1934년생)’을 모델로 내세웠고,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돌체 앤 가바나(Dolce&Gabbana)에는 펑퍼짐하고 주름살 많은 평범한 할머니 셋의 솔직한 웃음을 담아냈다. 70세의 메이 머스크(Maye Musk)는 미국 최고령 현역 모델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고, 75세의 이탈리아 모델 베네데타 바르치니(Benedetta Barzini)도 아직 무대에 오르고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할머니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은 그들의 구매력 향상과 관련 산업의 성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은 노인 관련 산업 규모가 2010년 27조 3,800억 원에서 2020년 72조 8,305억 원으로 3배 가까이 성장할 것이라 예측했다. 특히 제일 큰 성장이 여가와 식품 산업이라 했는데 이는 할머니들의 활동 무대 확대에 중요 변수가 될 것이다.


100세 시대 주인공은 나야 나
매주 토요일 아침 방송되는 시니어 토크쇼 <황금 연못>(KBS)은 각계각층에서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는 55세 이상 100세 이하 노인들의 토크쇼다. 대부분의 노인 프로그램이 건강 정보 전달과 상담을 위주로 하고 있다면 <황금 연못>은 일, 여가 활동, 가족 간의 고민에서부터 사랑까지 다양하다. 시종일관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하는 출연진들, 재미있는 것은 이야기의 주도권을 할머니들이 잡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금기의 영역이 컸던 만큼 평생 들어온 “어디서 여자가”라는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어 하지 않는 할머니들은 잠시도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더 이상 삶의 조연이나 단역이길 거부하는 그들은 깊어진 주름도 늘어진 뱃살도 두렵지 않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세상의 중심에 서보고 싶을 뿐이다. 그것이 100세 시대 할머니 전성시대를 만들어가는 힘이다. 할머니들에겐 아직 해보지 못한 일은 있어도 할 수 없는 일은 없어보였다. 이 밤도 어딘가에서 “오늘 밤 주인공은 나야 나”라고 외치는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성명 : 공희정

약력 :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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