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대로(大路)는 성으로 향하지 않았다. 길은 성으로 향하는 듯하다가, 마치 의도한 것처럼 성으로부터 구부러져 버려서 좀처럼 성에 가까워지지 않았다.
카프카 <성> 중에서
오랜 기다림 끝에 겨우 프라하 성 안으로 들어왔다. 프라하 성은 그 웅장한 규모만큼이나 유럽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바로 최초의 세계대전이라 할 수 있는 30년 전쟁 (1618-1648)이 시작된 장소가 바로 이곳 프라하 성이기 때문이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신교의 중심지가 된 프라하와 보헤미아 지역은 구교를 숭앙하는 상국(上國) 신성로마제국과 극심한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된다. 이 갈등은 제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보헤미아 귀족들이 비엔나에서 파견된 제국 관리들을 창밖으로 내던지면서 파국적인 결말을 맡게 된다.
보헤미아의 봉기로 쫓겨난 합스부르크 출신의 페르디난트 2세가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로 하여금 프라하를 공격하게 하고 바이센베르크 전투에서 보헤미아의 신교군이 제국군에게 참패함으로써 체코 최초의 독립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다시 독일인들의 지배하에 들어간 체코는 1919년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독립하기까지 270년의 시간을 더 기다리게 된다.
이러한 역사를 감안해보면, 프라하 곳곳에 지여진 수많은 화려한 바로크 성당과 부속건물들은 기실 게르만 지배자들의 종교적 억압의 도구였음이 드러난다. 짧은 독립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기간(1919-39)과 독일로의 강제병합(1939-1945)을 거쳐 소련에 의한 억압적 간섭에 이르기까지 체코의 역사는 피지배와 저항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 크고 작은 역사의 흔적들이 모두 프라하 성 속에 공간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 내의 역사박물관에서 프라하 성의 역사를 꼼꼼히 톺아보고 아름다운 대성당을 구경한 후 본격적으로 카프카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대성당에서 북쪽으로 한참 걸으면 성곽에 면한 길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곳이 바로 카프카의 흔적이 베인 황금소로이다. 무척이나 예민했던 카프카는 1916년 경 소음이 없는 한적한 작업실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남편의 세계대전 참전으로 인해 여유가 생긴 막내동생 오틀라의 도움으로 이곳에 작은 집 한 채를 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인력이 작용하지 않는 무중력 상태의 이 외딴 작업실에서 그는 <시골의사 Ein Landarzt (1918)>,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 Ein Bericht fuer eine Akademie (1917> 등 수많은 명작을 탄생시킨다. 이곳은 “카프카의 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카프카는 이곳을 작업실로만 사용했을 뿐 실제로 거주하지는 않았다. 당시 그는 이곳에서 약 1킬로미터 떨어진 쇤부른궁전 Schoenborn-Palais에 거처를 마련해 놓았었다. 실제로 집 내부로 들어가 보면 너무나 협소하고 허름해서 과연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10년 만의 방문에 감회가 남달라 기념사진을 한 장 찍은 후, 작업을 마치고 자정 무렵 집으로 향하던 카프카의 흔적을 쫓아 시내로 내려왔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성으로의 여행이 시작된 원점인 프란츠 요제프 다리였다. 이 다리의 한쪽에 카프카 가족의 아파트 쭘 쉽(Zum Schiff)이 위치해 있다면, 다른 한편엔 또 다른 역사적 장소가 있기 때문이었다.
카프카의 시선이 향했을 다리 건너 언덕 위에는 현재 거대한 메트로놈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이 자리엔 원래 체코 독립의 아버지인 마사리크 Masaryk의 조각상이 세워질 예정이었는데,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소련의 영향 아래에서 건설됨으로써 스탈린 조형물이 설치되게 된 것이다.
이 거대 석상은 스탈린 사후인 1962년 폭파 해체된 후 기단만 방치되어 있다가 1991년 그 위에 초대형 메트로놈이 설치되었다. 이 메트로놈이 무엇을 상징하는지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지만, 필자는 여기서 계속된 외부의 침략과 지배 속에서 때로는 독일로 때로는 소련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음에도 자신의 페이스를 잃지 않았던 체코인들의 끈기와 독립에 대한 열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또한 유럽통합 이후 다시금 커지는 독일의 영향력에서 오는 위협을 체코인들의 극우화의 방향이 아닌 민중의 단결된 힘으로 뚜벅뚜벅 극복해 나가리라는 희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카프카의 흔적을 찾아 떠난 프라하 여행을 마치면서 마지막 향한 곳은 유대인 거주지역이였다. 이곳의 공동묘지에 카프카가 영원한 휴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평생 프라하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지만, 프라하의 발톱은 그를 끝끝내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1924년 폐결핵 합병증으로 비엔나 근교 키어링의 병원에서 사망했지만, 그의 시신은 프라하로 옮겨져 결국 이곳에 묻혔다.
카프카의 가족묘지에는 그와 부모님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다. 그가 사랑했던 동생 오틀라와 다른 두 명의 동생은 모두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당했으며, 오로지 그들의 이름만이 묘비 아래 조그만 명패 속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추기(追記):
한국의 탄핵정국에 즈음해 프라하 성에 대한 원고를 작성하면서 카프카의 미완성 소설 <성 Schloss (1922)>이 생각났다. 소설은 토지측량사인 K가 성에서 부름을 받고 측량을 위해 성이 위치한 어떤 마을로 향하면서 시작된다. 이어서 불합리하고 불투명한 지배자들의 공간인 성과 그 곳으로 들어가 토지를 측량하려는 K간에 답답하고 지리멸렬한 대결이 내내 이어진다.
무수한 노력과 시도에도 불구하고 K는 결국 성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겉보기에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듯하지만 불투명하고 작위적으로 작동하는 성의 권력은 결국 K에게 승리를 거둔다. 소설 속 성의 모습을 보면, 접근 불가능한 성 속에 숨어 권력의 간계를 이용해 세월호 등의 진실을 밝히려는 국민의 노력을 무산시키고자 온갖 불의를 일삼았던 박근혜 정권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 성의 권력은 결국 붕괴했다. 혼자였던 K는 실패했지만, 한국에서는 수백만 민중이 광장에 모여 성의 문을 열 것을, 진실을 밝히고 측량하게 해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민중의 힘으로 성으로 향하는 대로가 활짝 열렸으며, 탄핵을 통해 성 안에 숨은 지배자의 무리를 끌어내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 동안 감춰졌던 진실을 측량하고 민중이 주인 되는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해 성 안으로 진입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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