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취업, 결혼, 출산을 줄줄이 포기한다. 그래서 삼포, 사포, 심지어 무한대의 N포 세대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비싼 등록금, 힘겨운 아르바이트, 살벌한 취업 전쟁… 현재의 젊은이들이 어느 때보다 녹록치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인생의 봄날을 즐기며 자유와 일탈을 꿈꾸는 청춘 드라마는 박물관에서나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자조스런 이야기도 나온다. 그러나 최근 몇 년 간의 방송가를 보면 아이러니컬하게도 ‘청춘’이라는 단어가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tvN의 여행 예능 <꽃보다 청춘>, SBS의 리얼 예능 <불타는 청춘>, KBS 2의 스포츠 리얼리티 <청춘FC 헝그리 일레븐>, 그리고 최근 JTBC의 드라마 <청춘시대>까지.
과연 이들 방송에서 청춘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걸까? 그것은 현실의 각박함을 잠시 잊기 위한 낭만적인 동경일 수도 있다. “우리의 젊은 날은 아름다웠지”라며 과거를 찬미하는 복고 타령일 수도 있다. 혹은 진정으로 이 시대 젊은이들의 아픔을 함께 하고자 하는 공감의 표시일 수도 있다. 지금 우리 방송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청춘을 소환하고 있다.
푸를 청(靑) 봄 춘(春). 청춘이라는 말은 ‘봄처럼 푸르른 인생의 한 때’를 뜻한다. 원래 중국에서 오행사상에 따라 각 계절에 적합한 색을 붙인 데서 유래했다. 푸른 봄(?春), 붉은 여름(朱夏), 하얀 가을(白秋), 검은 겨울(玄冬) 같은 식이다. 그런데 19세기 후반부터 일본인들이 청춘이라는 말을 특히 좋아하게 되었다. 이어 우리나라에서도 1900년대 초반 계몽잡지를 중심으로 이 말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청춘은 처음에는 20대 전후의 젊은 시기를 뜻하는 중립적인 단어였다. 그런데 1920년대 개화기를 맞으며 근대 문학에 의해 ‘감각과 감정을 숭상하고 개체성을 긍정하는’ 어휘로 전환하게 된다. 해방 이후에도 이런 경향은 이어졌다. 청춘의 때는 인생에서 예외적인 시기로 특별한 자유와 도전이 허락된다. 때론 실패하고 그로 인해 상처받기도 한다. 허나 젊은이들이 각자의 삶을 꽃피우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 사회 전체에도 큰 활력이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1970년대 통기타와 청바지로 대표되는 청년 문화가 대두되면서 다시 청춘이 부각된다. <바보들의 행진> <고래사냥> 등의 영화에서 대학생과 청년들은 기성세대에 저항하며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 “자, 떠나자. 고래 잡으러.”1980년대 민주화를 거치며 청춘의 희생은 더욱 고귀한 신화가 되기도 했다.
1990년대 TV는 대학생과 20대 사회 초년생을 주인공으로 해서 ‘청춘 드라마’라는 장르를 유행시킨다. MBC의 <질투>, <걸어서 하늘까지> <마지막 승부> KBS의 <내일은 사랑> <느낌> 등에서 젊은 주인공들은 밝은 얼굴로 미래에 도전하며, 사랑, 학업, 우정 심지어 실패까지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갔다. 손지창, 이병헌, 최진실, 심은하, 고소영, 장동건, 김민종 등 당대 인기 탤런트들은 ‘청춘 스타’라는 브랜드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 시대 청춘물이 만들어낸 압도적인 카리스마는 오늘날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금 방송과 영화에서 ‘청춘’이라고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는 바로 이 때의 청춘 드라마들이다.
2010년 경부터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청춘, 스펙에 변명하지 마라> 같은 토크 콘서트가 열리는 등 대중문화 전반에 청춘 마케팅이 득세하게 된다. 갑갑한 현실에 좌절한 채 고시원에서 시험 공부에 열중하는 젊은이들에게 좀더 과감한 도전을 기대하는 목소리들이다. 위로, 힐링, 멘토링 등의 단어들이 즐겨 청춘과 겹쳐 등장하는 모습을 보면 그 성격을 알 수 있다.
이런 분위기는 방송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청춘의 열정을 되살릴 수 있을까?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는 1980~90년대 청춘들의 뜨거운 이미지를 재현했다. <꽃보다 청춘>은 20대 젊은이는 물론, 40대 음악인들까지 배낭 여행에 도전하게 만들었다. <불타는 청춘>은 한때 최고의 청춘 스타였던 40대 연예인들을 모아 그 시절의 추억담을 나누게 한다. 그런데 이들 프로그램의 서정적 자아가 과연 현재의 청춘인지는 의문이 든다. 오히려 복고적인 감정으로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중년들의 감수성이 더 깊이 배어 있는 것 같다. <푸른 거탑> <진짜 사나이> 같은 병영 프로그램의 인기도 이와 연관 지울 수 있다. 20대 초반의 가장 힘든 체험인 군대 생활까지 청춘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김수로, 서경석, 라미란 등 40대가 그 고난을 겪으며 외친다. “힘들지만 이겨 낼테야. 우리는 여전히 청춘이니까.”
최지우가 주연으로 나왔던 tvN의 <두 번째 스무 살>은 좀더 기묘한 형태이다. 이 드라마는 분명 캠퍼스를 배경으로 한 러브 스토리이지만, 그 주인공은 마흔을 앞두고 있는 늦깎이 대학생이다. 물론 그 주변의 젊은 캐릭터들을 통해 오늘날 각박한 대학생의 현실을 보여주기는 한다. 그러나 캠퍼스 러브 스토리까지 40대의 엄마 아빠가 뺏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지금 애절하게 청춘을 외치는 어른들에게도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20대 때 즐겨보았던 청춘 드라마의 모습이 바로 자신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학생 운동 때문에 심한 고초를 겪기도 했고,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도 지금 같은 자유는 없었다. 단적으로 당시에는 해외 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외국 여행의 기회조차 얻기 어려웠다. 그래서 뒤늦게마마 페루로 배낭 여행을 떠나며 <꽃보다 청춘>이라는 깃발을 흔드는 것이다.
좀더 진지하게 청춘의 현실에 접근하고 있는 시도들도 있다. KBS <다큐 1>의 청춘 2부작은 국내외 청년실업 문제를 조명하며 4명의 청년을 밀착 취재해 그들의 실생활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비정규직과 인턴 생활에 지친 젊은이들은 꿈을 꾸는 것 자체가 사치라고 여기기도 한다. 스스로를 잉여라고 부르는 좌절된 청춘들을 주인공으로 한 프로그램들이 한동안 나오기도 했다. <청춘FC 헝그리 일레븐>은 프로 축구단에 들어가지 못한 선수들에게 유럽 전지 훈련을 통해 마지막 기회를 주는 프로젝트였다. 흥미로운 기획이었지만 일회성 이벤트로서의 한계가 아쉬웠다.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은 노홍철과 20~30대 청춘 4명이 최소의 생계비에 현지에서의 생산 활동을 통해 20일 간 유럽을 여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출연진들의 만만찮은 스펙 때문에 과연 진짜 잉여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는 했다. 그래도 젊은 날에만 가능한 무모한 도전의 한 방법을 선보여주기는 했다.
최근에는 JTBC의 <청춘시대>, tvN의 <혼술남녀> 등 청춘의 현실을 그린 드라마들이 만만찮은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청춘시대>는 얼떨결에 하우스메이트가 된 다섯 여대생의 솔직한 동거 생활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혼술남녀>는 노량진 고시 학원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주인공인 학원 강사 커플보다는 조연인 고시생들의 생생한 현실들이 더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청춘시대>의 주인공들은 성격도 취미도 삶의 태도도 제각각이다. 특히 타고난 미모를 적당히 이용하며 편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강이나와 아르바이트에 치여 항상 칙칙한 얼굴로 지내는 윤진명의 모습은 극과 극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깜깜한 현실 속에서 각자의 답을 찾기 위해 애써나가고 있고, 결국 서로가 함께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같은 청춘이니까, 같은 여자니까.
“노량진까지 왔으면 공부나 하시지.” <혼술남녀>에 나오는 기범, 채연, 공명, 동영 등 공무원 수험생들의 모습은 더 비참하다. 좁디 좁은 취업문을 통과하기 위해 연애도 포기하고 자존심도 버려야 한다. 그러다 좌절하여 쪽지를 남기고 동해로 가기도 한다. 그 옛날 <고래 사냥>처럼 멋진 고래 한 마리 잡으러 떠나는 것도 아니다. “합격해서 꼭 갚고 싶었는데 이렇게 빚만 지고 떠나네. 다음 생엔 부자로 태어나서 멋지게 술 한잔 살게.” 그러고선 뒤늦게 따라온 친구들에게서 회를 얻어먹고 돌아온다. 처절한 도전도 기상천외한 성공도 비극적인 희생도 없다. 그런데 거기에 공감하는 게 지금의 청춘이다.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대학 연구팀의 빌표에 따르면, 사람의 일생 중 가장 행복한 시기는 15~24세 사이라고 말한다. 그 시절은 흔히 행복의 조건이라 말하는 돈이나 명예와는 거리가 먼 때다. 대신 신선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무엇에든 도전해서 자신의 꿈을 만들어 갈 수 있는 때이다. 방송은 오랫동안 그 행복한 시절, 청춘에 대한 판타지를 만들어왔다. 지금은 그 판타지가 공감을 얻기엔 힘겨운 때인 건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에 밀착하면서도 조금씩 희망의 싹을 보여주는 프로그램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청춘들은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 언제 그랬냐는 듯 먼지를 툴툴 털고 일어나 내달릴 것이다. 물론 ‘아픈 것도 경험이지. 언젠가 이 모든 게 지나갈거야’ 라는 무책임한 위안이나 ‘우리 젊을 때는 안 그랬는데. 요즘 애들은 객기도 없어’ 라는 꾸지람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프로그램의 1인칭 앵글 안으로 현실의 젊은이들이 자꾸 들어와야 한다.
성명 : 이명석
약력 : 대중문화비평가
[ 출처 :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 게시요건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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