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 게시요건 확인]
“TV 좀 그만 보고 책 좀 읽어.” “공부는 너나 해. 난 이 프로그램 본방 사수해야 돼.”책과 방송, 공부와 TV는 서로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져 왔다. 국민의 여가 시간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관계로 보자면 당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최근 출판 시장의 어려움을 볼 때 승패는 분명하다. 문화체육관광부의 국민 독서실태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대한민국 성인 남녀 10명 중 4명은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 그러나 TV가 책을 보지 않는 사람들의 시간과 관심을 모두 가져간 것은 아니다. 스마트 폰을 중심으로 다양한 콘텐츠가 개발되면서, 전통적인 방송 미디어도 적지 않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인지 TV와 책, 방송과 공부가 손을 잡아보려는 시도가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아직은 어색하지만 기대 또한 적지 않은 콜라보레이션, 그 핵심 고리는 ‘인문학’이다.
EBS 스페셜 프로젝트 <내 여친은 지식인> / 사진출처 ebs.co.kr
한때 독서 프로그램이 전 국민의 관심을 받는 예능이었던 적이 있다. 김영희 PD의 히트작인 MBC <느낌표-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는 김용만과 유재석의 진행으로 과감한 독서 운동을 벌였다. ‘과도한 몰아주기’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크게 끌어올린 것은 사실이다. 독서 인프라의 확충을 위해 전국의 벽지에 어린이 도서관을 세우는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도 큰 호응을 얻었다. 이외에도 <느낌표>는 박경림의 길거리 특강, 다큐멘터리 이경규 보고서, 위대한 유산 74434 등 인문학과 결합된 예능의 선구적인 시도들을 벌였다. 그러나 자극적인 버라이어티 예능의 홍수 속에 그 맥은 끊어지고 말았다.
출판 시장의 지속된 침체는 책 관련 프로그램들의 축소와 폐지를 불러왔다. 물론 대중성을 얻기 위해 여러 소프트한 장치들을 도입하는 시도들은 이어져왔다. 하지만 전문가 패널에게 나비 넥타이와 모자를 스타일링 해준다든지 하는 식의 표면적인 변화는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그래도 KBS는 공영방송 답게 책 관련 프로그램을 꾸준히 이어 오고 있다.
방송가의 전통적인 인문 교양 프로그램들이 부진을 거듭해가던 도중에 뜻밖의 바람이 불어왔다. ‘쉬운 인문학’을 테마로 한 교양 팟캐스트들이 다수 등장해 만만치 않은 인기 몰이를 하게 된 것이다. 팟캐스트는 음악 없이 목소리로만 전하는 라디오이기 때문에, 지식과 교양 쪽에서 좋은 콘텐츠들을 많이 쏟아내게 되었다. 대중들은 ‘책과 글’이라는 무거운 형식이 아니라 ‘말’이라는 쉽고 편안한 형식으로 짜투리 시간을 활용해 인문학적 지식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더불어 토크 콘서트 형식으로 벌어지는 유명 강사들의 인문학 강연도 인기를 모으게 되었다. 여기에도 ‘한 권의 책을 혼자 파고드는 것보다는 권위 있는 누군가의 입을 통해 핵심을 전달받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팟캐스트와 인문학 콘서트는 인문학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던 대중들에게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가 되었다.
OtvN의 <비밀 독서단>은 팟캐스트가 얻어낸 대중성을 벤치 마킹하며 새로운 스타일의 책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아예 출연자 진영들을 송은이, 김숙 등 인기 팟캐스트의 진행자들로 포진시키기도 했다. ‘이동진의 빨간 책방’이나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같은 형태를 TV 속에서 실현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허나 아직까지는 대중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는 이상의 획기적인 반응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팟캐스트의 핵심 장점은 진행자가 자유분방하게 개성적인 발언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러 진행자들을 스튜디오 토크쇼의 형태로 묶어놓아 그런 개성과 활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스타 저자를 불러 대화를 나누는 방식도 전통적인 포맷의 갑갑함을 벗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문학, 철학은 물론 만화까지 중심 테마로 삼아서 독서 교양의 외연을 확장하려는 시도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OtvN의 <비밀 독서단> / 사진출처 program.interest.me/otvn/>
팟캐스트와 더불어 인문학 열풍의 주요한 통로가 된 것은 토크 콘서트다. 과거에도 공개 강연 문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토크 콘서트’’강연 콘서트’는 강사의 일방적인 강의로 끝나지 않았다. 노래나 춤 공연을 곁들이기도 하고, 포스트잇으로 관객들의 질문을 받기도 하고, 보조 출연자들과 토크쇼를 벌이기도 했다. 주제에 있어서도 막연한 지식만이 아니라, 실제의 삶과 연관된 심리와 감정 문제들도 적극적으로 다루게 되었다.
김상중이 진행을 맡은 OtvN의 <어쩌다 어른>은 ‘지친 어른들의 걱정을 치유할 프리미엄 특강쇼’를 표방하고 있다. 인문학 스타강사들을 TV로 불러모아 공개 강의의 기회를 주고, 여기에 토크 콘서트 형식으로 입체적인 재미를 이끌어내려고 한다. 방청석에도 연예인들의 자리를 마련해, 이들이 관객의 대표로 솔직한 질문과 대답을 나눌 수 있도록 유도한다. 분명 의미 있는 시도이지만 스타 강사의 자질이나 선정적이고 단정적인 강연 내용 때문에 여러 논란을 만들어내고 있기도 하다.
OtvN의 <어쩌다 어른> / 사진출처 program.interest.me/otvn/
진지한 인문학적 지식을 느슨한 TV 대중들까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SNS 상에 최근 이런 우스개소리가 올라왔다. “힉스 입자가 뭔지 초등학생도 알 수 있게 설명해주세요.” “일단 후설의 현상학을 초등학생도 알 수 있게 설명해 주시면 그렇게 해드리죠.”또한 스마트 시대의 빠른 자극에 익숙해져 있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집중력을 가지고 강의를 경청하게 만드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지명도가 높은 스타 강사의 필요성이 더욱 커진다. Jtbc의 <차이나는 도올>은 카리스마 넘치는 방송형 강의에 특화된 동양 철학자 도올을 통해 ‘중국’이라는 아주 관심도 높은 주제로 강의를 펼쳤다. 허나 과거 도올이 거두었던 만큼의 반응을 이끌어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최근 가장 독특한 시도는 ‘연애담과 인문학의 조금 특별한 만남’을 자처한 EBS 스페셜 프로젝트 <내 여친은 지식인>이다. 이 프로그램은 평범한 공대 남학생 문하가 문대 장학생인 여자친구 채영을 통해 인문학의 세계에 들어가는 과정을 그린 3부작 드라마다. ‘롤랑 바르트’ ‘아비투스’ 같은 철학자의 이름과 문화 비평의 용어를 연애 드라마에서 만나게 한다는 것은 제법 흥미로운 발상이다. 여자친구가 알아 들을 수 없는 어려운 말을 할 때는 다스 베이더 가면을 쓴 것처럼 표현하고, 둘의 논쟁을 이종 격투기 게임 화면처럼 묘사하는 장치들도 눈길을 끌게 만든다.
허나 남자 주인공이 즐기는 컴퓨터 게임을 괄시하고, 어려운 프랑스 철학의 용어를 숭배하는 식의 이분법은 너무 뻔하다. 현대의 시청자들을 사로잡기엔 지나치게 전형적인 구도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인문학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에겐 여전히 어려운 이야기로 잘난 척 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인문학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춘 사람에게는 손발이 오글거리는 상황으로 여겨진다. 드라마 자체는 이렇게 앙상하지만, 그래도 곳곳에 등장하는 물음들은 제법 흥미롭다. “왜 즐겁지도 않은데, 즐거운 표정으로 SNS에 사진을 찍어 올리는 거야?” “왜 신상 가방을 위해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하는 거지?” 인문학의 핵심이 세상이 당연하다 여기는 일에 물음을 던지는 것이라면, 이 드라마는 어느 정도 가치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인문학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여전히 적지 않다. 단순한 지식, 자격증, 스펙만으로는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할 수 없다는 이야기들이 들린다. 철학, 문학, 예술을 통해 인간성 전체를 포괄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키우고, 그로부터 창의력과 상상력을 발휘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 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와 도움 없이 갑자기 풍덩 인문학의 바다 속으로 뛰어들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구든 배움에 대한 의지는 있지만 방법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인문학과 손잡은 TV 프로그램들이 이들과 함께 해주면 좋겠다. 아직은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는 단계이지만, 우리는 계속 방법을 찾아 나가야 한다.
KOFICE
성명 : 이명석
약력 : 대중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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