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이라는 모순: 아이돌 음악과 다양성에 대한 고찰
현재의 한국 대중음악을 이야기하며 K팝을 언급하지 않는 건 일종의 기만이다. 빌보드 차트 1위에서 연간 음반판매량 2000만장 돌파, 프로그램 화제성에서 브랜드 가치까지, K팝은 전공인 음악은 물론 음악과 전혀 관련 없는 영역에서마저 정상을 넘나들며 연일 쾌거를 올리고 있다. 화려하고 세련된 음악과 퍼포먼스로 한국에서 대중음악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이래 가장 많은 그리고 다양한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음이 분명한 아이돌 음악은 그러나 동시에 뼛속 깊은 모순을 가지고 태어난 장르이기도 하다. 독자적 매력으로 그러나 동시에 소모적이며 착취적인 방식으로 성공의 나팔을 올린 아이돌 산업. 여전히 안고 있는 태생적 모순, 고질적 불균형을 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는 한 K팝의 미래는 결코 밝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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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이미지 출처: http://arsnovanyc.com/KPOP
1. ‘大K팝시대’의 도래
바야흐로 K팝의 시대다. 이제는 ‘大K팝의 시대’라 해도 좋을 것 같다. 다소 과장처럼 들리는 이 말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건 당장 2018년 한국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각종 지표들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우선 음반 시장을 보자. 2018년 연간 국내 음반판매량은 2000만장을 넘어섰다. 21세기 초, 음반에서 디지털 음원으로 빠르게 적응을 마친 시장의 변화를 바라보며 한 시절을 풍미한 매체의 소멸에 구구절절 애달픈 이별가를 바친 것이 어쩐지 머쓱해지는 수치다. 연간 음반 판매량 2000만 장 돌파는 해당 지표를 발표한 가온차트가 음반 판매량을 집계하기 시작한 2010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2017년 기록인 1600만 장에서 고작 1년 만에 400만장을 더할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K팝 아이돌 그룹들의 눈부신 선전 덕분이었다. 일명 ‘엑방원’이라 불리는 엑소, 방탄소년단, 워너원의 기세가 대단했다. 이들은 앨범 종합 차트 최상위권 열 장 가운데 무려 일곱 장을 자신들의 몫으로 챙겼다. 1위를 자치한 방탄소년단의 [LOVE YOURSELF 結 ‘Answer’]는 총판매량 217만6863장이라는 기록적인 숫자를 자랑하며 더블 밀리언 자리에 올랐고, 이들이 같은 해 발표한 [LOVE YOURSELF 轉 ‘Tear’] 역시 183만8692장을 판매하며 2위에 자리했다. 지난 2013년 한국 대중음악시장에 12년 만의 밀리언셀러를 선사했던 전통의 음반 강자 엑소도 여전히 강했다. 정규 5집 [DON'T MESS UP MY TEMPO](119만2975장)가 3위, 유닛그룹인 EXO-CBX의 [Blooming Days](36만3788장)는 8위를 차지했다. 1년 반이라는 한정된 기간 동안 활동하며 신인으로 세울 수 있는 거의 모든 기록을 바꾸고 떠난 워너원의 흔적도 눈부셨다. 워너원은 2018년 한 해 자신들의 이름으로 발표했던 세 장의 앨범 모두를 10위권 안에 안착시키는 진기록을 세웠다. 세 그룹의 음반 판매량만 더해도 800만 장이 바로 눈앞이다. 더욱 놀라운 건 상위 50위 권 가운데 아이돌 음악이 아닌 앨범은 중국을 중심으로 뜨거운 인기를 얻고 있는 황치열의 미니 2집 [Be Myself] 단 한 장뿐이었다는 사실이다.
워너원
*출처: 워너원 공식 네이버포스트 페이지
이쯤에서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건 이들이 한국 대중음악계의 최전선에서 이끈 것이 비단 음반판매량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각각 아이돌 신(scene)을 대표하는 3대 기획사 가운데 하나인 SM엔터테인먼트, ‘중소의 기적’이라 불리는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이제는 아이돌 시장의 판도를 뒤바꿔 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닌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 출신인 이들은 최근 수년간 K팝 시장 전반은 물론 한국 대중음악을 둘러싼 이슈 대부분의 중심에 자리했다. 미국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붐까지, 손꼽을만한 굵직한 이슈 대부분이 이들을 중심으로 한 K팝 시장에서 흘러나왔다. 음반에 비하면 약세라고는 하지만 음원 시장 안에 자리한 K팝의 입지도 꽤나 탄탄한 편이다. 단적인 예로 ‘지금’과 ‘대중’을 대표하는 음악 소비 방식이라 할 수 있는 스트리밍 순위를 살펴보자. 5년 전인 2014년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순위 집계를 시작했을 정도인 이 따끈따끈한 최신 시장은 100만장을 판매한 앨범에 부여하는‘밀리언셀러’처럼 ‘1억 스트리밍’을 돌파한 곡에 ‘플래티넘’인증을 수여한다. 그렇게 플래티넘 인증을 받은 2018년 출시곡은 총 10곡, 그 가운데 아이콘 ‘사랑을 했다’(6월), 모모랜드 ‘뿜뿜’(8월), 마마무의 ‘별이 빛나는 밤’과 블랙핑크의 ‘뚜두뚜두’(11월), 청하 ‘롤러코스터’(12월) 등 다섯 곡이 아이돌 음악이었다. 결코 적지 않은 비중이다.
2. 아이돌 음악은 ‘왜’: 각종 쏠림 현상의 원인들
지금과 같은‘K팝 대세’분위기가 조성된 건 비단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아이돌 음악은 꾸준한 영업과 끊임없는 도전 그리고 그에 따른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업계에 시나브로 스며든 장르다. 생각해 보면 꽤나 긴 시간이었다. 한국 음악 산업에 아이돌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지도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고,‘국경을 넘어 사랑받는 K팝’이니 ‘아이돌 산업은 이제 하향세에 접어들었다’느니 하는 목적 없는 공염불이 업계를 유령처럼 떠돈 것도 거의 10년 가까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 짧지 않은 부침의 시간 동안 K팝은 부지런히 자신만의 영토를 넓혀 나갔다. 주도권을 잡고 있던 기성세대가 시대의 변화 앞에 미적대는 사이 K팝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다양한 음악 장르와 서브 컬쳐를 편견 없이 혼합했고, 해외 작곡가들과의 협업이나 곡 수입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진취적 태도가 불러온 과감함은 K팝이 획기적인 동시에 수준 높은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각종 불합리한 관행도 ‘7년 표준계약서’로 대표되는 상식선을 공유하기 시작했고, 아이돌 음악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할 수 있는‘퍼포먼스’를 중심으로 한 무대, 영상의 질적 성장 속도도 발군이었다. 록스타 부재의 시대, 동아시아의 작은 반도에서 우연히 쏘아올린 작은 공은 그동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위치해 있던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운명적으로 발굴되며 영웅으로서의 새 생명을 얻었다.
화려한 성공이 전한 단맛과 무한한 성장력이 내뿜는 빛에 넋을 빼앗긴 사이 그늘도 점차 짙어져 갔다. 시대가 바뀌어도 각종 ‘쏠림 현상’에 대한 비난의 화살은 아이돌 음악을 향해 지속적으로 쏟아졌다. 근거 없는 비판은 아니었다. 공중파 음악 방송은 채널과 요일만 다를 뿐 흡사한 형태의 아이돌 그룹들만을 초대한 음악 방송을 관성적으로 제작/편성했고, 시청자와 대중의 결정권은사라진지 오래였다. 섬세한 취향은 소멸되었고 업계 불균형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어 갔다. ‘아이돌 음악이 잘 된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을 마치 골드러시에 몰려든 광부들처럼 앞다투어 가상의 금광에 몸을 던졌다. 스타가 되고 싶은 10대 연습생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꿈꾸는 제작/투자자들까지, 세상만사 천태만상이 궁금하면 불특정 다수의 욕망으로 요지경이 되어버린 K팝 세상만 노크해도 될 노릇이었다. 그러나 한 편, 그렇게 성공의 단꿈을 꾸며 한 점으로 모이는 인력과 자본, 노력을 어떤 근거로 비판만 할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기도 한다. 아이돌 음악은 지금 한국 대중음악시장에서 그 자체로 가장 주목받는 분야이자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드문 장르이기 때문이다. K팝은 대중음악 생태계의 근간을 뒤흔드는 나쁜 골리앗인가 아니면 각종 시대정신이 절묘하게 맞아 들어간 풍운아인가. 아직까지 그 누구도 시원하게 결론 내리지 못한 아이돌 산업을 둘러싼 각종 이해와 대립은, 실은 K팝이 태생적으로 타고난 구조적 특징과 한계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래 서술할 두 가지 요소는 성공과 실패,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그려내며 한국 대중음악계의 모든 것을 블랙홀처럼 흡수 중인 이상한 나라의 K팝이 품은 각종 모순의 근원이다.
2-1. 분자형 공동체
대중음악은 여러 대중예술 분야 가운데에서도 행위 주체의 재능이 전체의 성공을 크게 좌우하는 분야 가운데 하나다. 실제로 대중음악의 역사를 살펴보면 한 음악가의 뛰어난 재능이 라이브 클럽을, 소속사를, 장르를, 시대를 풍미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성공 신화는 뚜렷한 장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가장 큰 장점이라면 역시 다른 무엇도 아닌 순수한 음악만으로 부와 명예 모두를 거머쥘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얄궂은 건 단점도 바로 같은 지점에서 파생된다는 사실이다. 음악과 음악가가 무너지면 그동안 아무리 많은 이들이 함께 공들여 쌓아온 금자탑이라 할지라도 단숨에 무너지기 쉽다. 적재적소에 알맞은 전문가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분업을 기본으로 한 K팝의 제작 시스템은 바로 그런 대중음악계가 지닌 선천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대표적 사례다. 실제로 1996년 H.O.T.를 데뷔시키며 한국에 처음으로 본격 아이돌을 소개했다는 평가를 받는 SM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 회장은 과거 인터뷰를 통해 회사 설립 당시 가장 깊게 고민한 것이 바로 효율적인 분업 시스템의 구축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SM의 경우 2019년 현재 매니지먼트, 프로듀싱, 비주얼&아트, 콘텐츠 제작, 중국사업, 마케팅, IT, 경영지원 파트로 나뉘어 운영되고 있는데, 이는 현재 K팝을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엔터테인먼트 업체가 대동소이한 차이로 운영하고 있는 기본 사업구조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건 이러한 분업 구조가 기업 경영뿐만이 아닌 아티스트, 즉 음악가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K팝 아이돌을 정의할 때 자주 등장하는‘다인원’이라는 특수 요소는 꽤나 상징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평균 4 ~ 10인을 기준으로 필요한 멤버를 적절히 더하고 빼서 구성하게 되는 아이돌 그룹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기업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프로듀싱 파트가 또다시 국내와 해외 A&R, 캐스팅, 트레이닝 파트로 나뉘듯, 아이돌 그룹 역시 메인보컬과 리드보컬, 메인댄서와 예능담당 등으로 서로 간의 역할을 명확히 분배해 비로소 하나의 팀으로 완성된다. 멤버가 늘어나고 그만큼 보여줄 것이 많아지니 음악 역시 그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특정 장르 음악으로 자연스레 쏠리게 된다. 아이돌 음악 획일화를 이야기하며 자주 등장하는 ‘댄스 음악 일변도’라는 표현은 메인 댄서를 위한 댄스 브레이크, 다인원의 특징을 활용해 대중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는 크고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위해 K팝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쉽고 안정적인 선택지가 댄스 음악이라는 현실을 간과한 다소 관성적인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어느새 K팝의 기본이자 필수 요소가 되어버린 분업 시스템은 K팝만의 독자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K팝이 지금처럼 단기간에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단기간에 최고의 효율을 내기 위해 고안된 연습생 시스템이나 데뷔가 정해지면 정해진 숙소에서 합숙을 하는 것이 당연한 아이돌 그룹의 일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특별한 콘텐츠가 되었다.
이 노동집약적이고 때로는 인권침해의 요소마저 내포한 타이트한 운영이 가져온 의도치 않은 시너지 효과는 지금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K팝 산업은 그렇게 촘촘히 다져진 내부 구조의 밀도만큼 빠르게 성장해 갔고, 내부 각 분야는 점차 세분화, 전문화되며 보다 많은 전문 인력과 자본을 필요로 하게 됐다. 음악가에서 기업까지, 철저히 분업화 아니 이제는 분자화 되었다 해도 좋을 K팝 산업의 전반적 구조조정은 분업뿐만이 아닌 협업도 용이하게 만들었다. 패션, 미술, 영화, 광고 어떤 분야건 상관없었다. 기획은 물론 대중들까지도 분자 단위로 ‘쪼개져’있는 너른 K팝의 바다 한가운데, 우리는 이제 마음에 드는 것을 어디에나 끼워 넣어 입맛대로 뜯고 맛보고 즐길 수 있는 세상을 맞이했다.
2-2. 팬덤 중심의 수익구조
‘잘 만든 것은 언젠가는 대중에게 선택 받는다’는 소박한 믿음. 소리 내어 읽는 것만으로 가슴이 훈훈해지는 이 믿음은 그러나 슬프게도 21세기를 맞이한 대중음악계에서는 잠시 잊고 사는 것이 건강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현명한 지름길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만을 모은 효과적인 분업 시스템에서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7, 8년까지 언제 결실을 맺을지 모르는 잔인한 연습생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효율과 비효율을 한 몸에 키우고 있는 아이돌 산업은 합리적으로 보이는 외연과 달리 꿈과 자본이 없으면 끝까지 버틸 수 없는 자기 모순적인 요소를 다수 안고 있기도 하다. 재능 넘치고 지각 있는 누군가가 자기 안의 모순을 견디지 못해 K팝 산업 안에서 발을 빼려는 찰나, 그를 잡아두기 위한 마성의 미끼가 등장한다. 다름 아닌 팬덤이다. 과거 흔히 ‘빠순이’로 불리며 갖은 혐오와 멸시의 대상이었던 팬덤은 이제 K팝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자 권력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두 가지 큰 시대적 흐름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하나는 그 어느 때보다 ‘여론’을 중시하는 세태, 또 다른 하나는 보다 밀접해진 팬덤 크기와 수익 간의 상관관계다. 우선 여론 부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미 1세대 아이돌 시절부터 음악가를 위한 자발적인 민간 홍보대사 역할은 물론 음악가가 처한 불의 앞에서 물과 불을 가리지 않는 맹목으로 유명세를 탔던 이들의 열정은 21세기에 들어서며 한층 조직화되었다. 이제 국내는 물론 다양한 해외 팬까지 등에 업은 K팝 팬덤의 위력은 국제적인 여론 조성과 캠페인, 미디어 주목으로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러한 흐름은 자연스레 K팝의 직접적인 수익구조와 연결되었다. 인터넷 세상이 가져온 무한한 가능성 덕에 볼 것도, 들을 것도, 사랑할 것도 많아진 지금, 대중의 눈과 귀를사로잡기란 인류가 직립보행을 시작한 이래 가장 어려운 일로 손꼽히고 있다. 그런 대중의 이목을 끌기 위해 불철주야 연구 또 연구 중인 이들에게 대가 없는 열렬한 사랑과 높은 충성도를 자랑하는 K팝 팬덤의 존재는 그 자체로 너무나 매력적인 블루 오션이자 신기루다. 자본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모이는 곳에 자본이 모인다는 이 명쾌한 시대적 의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동시에 노골적으로 실천한 프로그램이 바로 <프로듀스 101>이다. 음악 전문 채널 엠넷이 기획해 2016년부터 매해 늦은 봄 방영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아이돌 연습생들을 대상으로 한 서바이벌을 기본 내용으로 하고 있다. 다만 다른 서바이벌 프로그램과의 차이라면 ‘국민 프로듀서’라 명명된 시청자들이 투표를 통해 자신이 선택한 연습생들로 구성된 그룹을 데뷔시킬 수 있다는 그 시나리오 단 하나였다.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단순해 보이는 이 시나리오 하나가 온 나라에 가져온 붐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특히 2017년 남자 연습생들을 대상으로 방영했던 두 번째 시즌의 인기는 그야말로 역대급이었다. <프로듀스 101>은 그해 각종 프로그램 화제성 지표 상위권을 휩쓴 것은 물론 최종투표를 통해 탄생한 그룹 워너원도 K팝 역사상 가장 높은 인기를 얻은 신인 그룹의 자리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포인트는 하나였다. 내가 뽑은 연습생을, 내가 만든 그룹으로 데뷔시킨다. 홍보와 마케팅은 물론, 제작과 기획의 열쇠까지 팬들의 손에 쥐어졌다. 이 프로그램은 아이돌 산업을 중심으로 부나방처럼 모여드는 사람, 돈, 권력, 욕망 그 모두가 어울렁더울렁 춤추며 그리는 마성의 소용돌이 그 자체였다.
방탄소년단의 글로벌 팬덤 'ARMY'
*출처: 아주경제(2018.5.29) [실검인물전] ‘방탄소년단’과 ‘아미’로 헤쳐모여
3. K팝(아이돌 음악)이라는 거대한 모순
결국, 이 모든 건 ‘K팝’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각종 모순으로부터 비롯된 결과다. 아이돌 음악은 음악성이 없다는 혹평에서 벗어나려 노력한 결과 대부분의 K팝이 일정 수준 이상의 질을 담보하게 되었지만, 장르적으로는 댄스 음악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음악가 한 사람의 재능에서 비롯된 흥망성쇠의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해 효율적인 분업 시스템을 고안해냈지만, 더 많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 결국 효율적인 착취 시스템까지 함께 갖춰 버린 것. 팬덤을 넘어선 대중의 인정과 사랑을 받고자 부단히 노력했지만, 충성도 높은 팬덤 자체가 그대로 권력과 여론이 되어 버린 세상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큰 목소리를 갖게 된 것. 모두 모순이 낳은 모순투성이의 결과다. 이 거대한 모순의 총합이 피워낸 불꽃은 아마도 꺼지기 직전까지 또 다른 모순을 탄생시키기 위한 희생양을 필요로 할 것이다. 마침 때도 무르익었다. 이제 막 다른 궤도에 올라선 다국적으로 구성된 K팝 해외 팬들의 기세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한국 대중음악 역사가 시작된 이래 최초라 해도 좋을 이 국제적 전성기로 인해 아이돌 산업은 앞으로도 당분간 인력, 자본, 화제성 등 장르와 분야를 막론한 각종 산업 요소들을 더욱 전투적으로 흡수해 나갈 것이다.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유튜브와 함께 국제적 성공을 이끌어낸 이후 국내 음악시장 규모가 매해 두 자릿수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것도, 국내 경제지의 헤드라인에 방탄소년단 소속사인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의 이름이 잊을만하면 오르내리는 것도 모두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 이슈들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떠오르는 문제는 모순과 불균형이다. 물론 가끔은 이러한 외침이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대중음악산업의 불균형을 타파하자는 목소리는 미디어가 대중음악을 다루던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달랐지만 80년대에는 MTV가, 90년대에는 주류 댄스 음악이 주요 타겟이었다. 그러나 아이돌 산업에 대한 논의는 조금 다르다. 바로 K팝을 중심으로 한 대중음악 산업 전반이 안고 있는 특유의 모순적 요소 때문이다. K팝 시장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모순을 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는 한, 아이돌 산업은 종래 몸집만 커다란 괴물 이상의 무엇이 되지 못할 공산이 크다.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지기 전에,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기 전에, 보다 큰 그림을 향한 대중음악계 안팎의 암묵적 합의와 존중이 필요한 시점이다. 몇 번을 강조해도 과하지 않다.
글ㅣ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
(출처 : 한류NOW 2019년 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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