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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귀향\'이 이룬 기적

[ 출처 :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 게시요건 확인] 

 제작기간만 14년,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참여한 사람들의 숫자는 7만5000명에 이른다. 일제강점기 위안부 소녀들이 겪은 일을 담담하게 그려낸 영화 ‘귀향’(감독 조정래·제작 제이오엔터테인먼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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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귀향'의 장면들(사진 제공 제이오엔터테인먼트)

 2월24일 개봉한 영화는 상영 3주 만인 3월12일 누적관객 300만 명을 돌파했다. 영화를 제작할 때도, 개봉을 준비하면서도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흥행’이다. 아픈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관객들은 극장으로 몰렸고, 이제 그 반응은 해외에서도 이어진다. 영화를 통해 우리 역사를 바라보고, 공감하려는 관객이 늘어나고 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실화를 소재로 한 ‘귀향’은 14년 전 연출자 조정래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이후 제작과 투자, 배우 캐스팅 과정에서 숱한 어려움을 겪은 끝에 빛을 본 작품이다. 제작진의 투자 요청을 받은 일부 투자사에서는 ‘위안부는 실재하지 않은, 꾸며낸 거짓’이라는 반응까지 보였다. 한일관계 등 정치적 이슈에 휘말릴 우려 탓에 선뜻 돈을 대겠다는 투자처는 나타나지 않았다. 영화계가 미처 관심을 쏟지 못한 부분을 대신 채워준 이들은 일반 관객들이다. ‘귀향’은 2014년과 2015년 두 차례 제작비 마련을 위해 클라우딩 펀드를 진행했다. 그에 참여한 관객이 7만5270명(20일 기준)이다. 그렇게 순제작비의 절반가량인 12억원을 모았다. 제작의 어려움에 공감한 배우들은 출연료를 받지 않았고 스태프들 역시 기꺼이 재능기부로 힘을 보탰다. ‘귀향’이 만든 ‘300만의 흥행 기적’은 그렇게 이뤄졌다.


 ‘귀향’의 300만 관객 흥행이 빛나는 이유는 더 있다. 먼저 ‘귀향’은 최대 후원자 기록을 세웠다. 일반 투자자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는 클라우딩 펀드로 제작된 한국영화 가운데 최고치다. 앞서 2012년 개봉한 영화 ‘26년’과 지난해 ‘연평해전’ 등이 제작비 마련의 어려움 속에 클라우딩 펀드를 진행했지만 참여한 후원자수는 ‘귀향’ 보다 적다. 더욱이 ‘26년’은 목표 금액을 채우지 못했고, ‘연평해전’은 일반 후원자보다 군 관련 기관 및 단체의 참여가 더 많았다. 

 ‘최다 후원자’ 기록은 ‘귀향’에게 ‘한국영화 최장 엔딩크레딧’ 타이틀까지 안겼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스크린을 꽉 채운 이름들이 장장 12분 동안 소개된다. 적게는 몇 천원에서 많게는 몇 백만원씩 ‘귀향’에 보탠 일반 후원자의 이름이다.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이어지는 엔딩크레딧은 또 다른 감동을 만들어낸다. 여러 사람들이 합심해 완성한 영화라는 메시지를 던지면서 객석에 앉은 관객을 일어나지 못하도록 붙잡는다는 반응도 줄을 잇고 있다.

 ‘귀향’의 시작은 2002년부터였다. 연출자 조정래 감독이 위안부 할머니가 모여 사는 경기도 광주의 나눔의 집으로 봉사활동을 다니기 시작한 때다. 생존 할머니 중 한 명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태워지는 처녀들’이란 제목의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본 조정래 감독을 영화화를 결심해 곧바로 시나리오를 썼고, 단숨에 완성했지만 정작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한 때는 그로부터 13년이 더 흐른 뒤였다.


조정래 감독은 ‘귀향’의 영화 제작 소식을 주위에 꺼낼 때마다 “위안부 영화를 누가 보겠느냐”는 질타를 10년 넘도록 들어왔다. 클라우딩 펀드로 모인 돈을 갖고 가까스로 촬영을 시작한 때가 지난해 4월15일이다. 여전히 제작비 충당은 어려웠다. 총 44회차를 찍는 동안 제작진은 하루에 두 장면 이상을 촬영하기가 어려웠다. ‘돈’이 없어서였다. 

 “프로듀서는 매일 돈을 구하려 다녔다. 촬영하다 멈추고 기다리면 프로듀서가 어디서 돈을 구해 와서 다시 카메라를 돌렸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지원도 있었다. 경남 거창군이나 대진대학교처럼 촬영장소를 무상으로 지원하는 곳이 나타나는 기적 같은 순간이 많았다. 일제강점기 타향에서 세상을 뜬 20만 명의 소녀들, 그 한 분 한 분을 고향으로 모시고 싶은 마음으로 만든 영화다.”(조정래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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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귀향'의 한 장면(사진 제공 제이오엔터테인먼트)
 
 ‘귀향’은 위안부였던 할머니 영옥(손숙)이 한 소녀를 만나 자신의 끔찍했던 과거를 떠올리고, 그 고통을 함께 위로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야기는 대부분 실제 벌어진 일들을 그대로 따랐다. 미처 알려지지 않은 역사의 이면까지 담담하게 그려냈다. 이렇게 완성된 ‘귀향’은 개봉을 앞둔 지난해 말 서울과 부산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시사회를 진행해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손숙과 오지혜, 정인기 등 기성 배우들은 물론 이름과 얼굴이 낯선 강하나, 최리 등 신인 연기자들의 활약도 지나치기 어렵다.

 배우 손숙은 “‘귀향’이 개봉해 관객에게 소개될 수 있는 과정은, 기적 그 자체”라고 말했다. 50년 가까이 배우로 살았지만 영화보다 연극에 더 집중해온 손숙은 마치 어떤 힘에 이끌리듯 ‘귀향’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과연 영화가 완성될 수 있을까”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지만 출연을 승낙하고 1년 반을 더 기다릴 때에도 ‘귀향’을 포기하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읽다가, 처음으로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10년째 투자자를 못 찾고 있다고, 거절만 당해왔다며 감독이 ‘꼭 도와 달라’는데, 거절할 수 없었다.”

 당시 위안부로 끌려갔던 소녀들은 이제 팔순을 넘어 구순의 나이가 됐다. 영화에서 손숙은 그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숨기고 살았지만 그 아픔을 한 번도 잊지 못한 인물. 용기 내어 위안부였음을 밝히는 장면부터 영화는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다. 해방을 한 해 앞두고 태어난 손숙이 체감하는 위안부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전쟁의 기억까지 또렷한 그는 “‘귀향’은 거짓말이 아니고, 오히려 역사적 사실을 절제해서 만든 영화”라며 “후손으로서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귀향’의 완성에는 숨은 주역이 더 있다. 영화 전체의 살림을 도맡았고, 일본군 역할로도 출연한 임성철 PD다. 그는 눈물로 제작진과 동고동락하며 ‘귀향’을 만든 지나칠 수 없는 주역이다. 원래 직업이 화가였던 임성철 PD는 조연으로 출연하기로 하고 2010년 ‘귀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가 짊어져야 하는 책임은 커졌다. 연출을 뺀 모든 부분을 인솔해야 하는 프로듀서의 역할이었다. 가족까지 일손이 부족한 촬영장으로 이끌었다. 인테리어 사업을 하던 형은 미술감독으로, 화가인 아내 역시 현장에 합류했다. 

 그렇게 5년간 고생하다 지난해 4월 촬영을 시작하고 얼마 지난 뒤였다. 극심한 고통에 병원을 찾았고 쿠싱병 발병 사실을 알았다. 호르몬 문제로 일어나는 희귀난치성질환. 심한 고통이 따르지만 촬영은 멈출 수 없었다고 했다. 연기하다가 갈비뼈가 부러졌고, 작년 말 4.5cm짜리 종양제거수술 부작용 탓에 진통제 없이 버틸 때도 임성철 PD는 변함없이 ‘귀향’의 곁을 지켰다.  
 
 이제 ‘귀향’은 세계로 향한다. 뜨거운 관심과 반응은 국내에만 머물지 않고 세계 각국에서도 일어나면서 3월11일부터 미국과 캐나다, 영국 관객과도 만나고 있다. ‘귀향’의 해외개봉 방식은 기존 상업영화와 조금 다르다. 배급사가 나서서 영화수출을 타진하는 여느 영화들과 달리, 해외 여러 나라에서 자발적인 ‘개봉 청원’이 이뤄지고 있다. ‘귀향’은 개봉을 앞두고 1월22일부터 1월30일까지 미국 서부와 동부 주요 도시에서 후원자 시사회를 열었다. 제작비 모금에 참여한 일반인 투자자 가운데 해외 후원자를 중심으로 해외 개봉에 대한 1차적 반응이 모아졌고, 국내 개봉 이후 계속되는 흥행 성과가 2차 관심으로 이어졌다.

 배급사를 통하지 않고 조정래 감독과 제작진에게 직접 전달되는 세계 각국의 ‘개봉 청원’도 많다. 프랑스와 스페인 등 유럽 국가와 호주 등이 현재 자국 개봉을 제작진에 요청한 상황이다. 미국 하버드대와 예일대 같은 교육기관은 물론 위안부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관련 기관들의 공동체 상영 제안도 잇따르고 있다. 아픈 역사를 지나치지 않으려는 이들의 움직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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